2025 서울시향 롱 유의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_4월 10일 리뷰
서울시향.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을 할 수가 없다.
인상 깊고 딱 집어낼 수 있는 구간이 없다. 왜냐? 그냥 악장이 지나가는 내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아래로 시선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웅덩이 한가운데에 놓였다. 소리에 압도당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무엇에 압도당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뭐 하나 압도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지휘, 연주, 협연, 앙코르, 청중, 분위기. 그 모든 것이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
내가 말한 그 ‘이상’의 수준이란, 간단하다.
그냥 그 공연장에 사람은 없었다. ‘작곡가’와 그 ‘소리’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클래식 공연의 여섯 가지 요소는 모두 소리 앞에서 배제된다. 유형의 존재들이 모여서 ‘무형’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듣고, 기다리는 그 순간들을 겪었다. 첫 곡은 무엇이었던가? <호반시치나> 전주곡이다. 전주곡인 건 둘째 치고, 이 곡이 묘사하고자 하는 풍경은 무엇인가? 모스크바의 새벽이다. 프로그램 노트에 따르면, 아직 잠에 빠져 있는 모스크바, 새벽을 알리는 새소리, 성 바실리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그려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무엇을 하겠는가? 음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새벽을 상징하는 키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나 또한 그러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7시 30분. 공연 시간이 딱 되고 지휘자가 입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모스크바의 새벽 가운데에 빨려 들어갔다. 내가 내 상상을 끼워 넣을 자리조차 없었다. 이미 난 그 가라앉은 종소리와 호숫가 앞에 덩그러니 놓여버렸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찰나가 그날의 공연 전체를 미리 예고했다. 오늘 공연에서는 아무런 잡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닝펑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실연’했다. 연주가 아니었다. 연주라 함은 무엇일까? ‘악기를 다루어 곡을 표현하거나 들려주는 일’을 뜻한다. 그렇다면 실연은? ‘실제로 하여 보임’이다. 닝펑은 프로코피예프라는 사람을 보여냈다. 이 곡은 ‘연주 여행을 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망명기 프로코피예프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제1악장의 주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제2악장의 주제는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썼고, 관현악 총보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완성되었다고 했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녔던 한 사람의 일대기 속에서 태어난 곡이다. 뭐, 나도 알고 들어갔다. 근데 생각 안 났다! 생각할 틈 자체가 없었다. 그냥 생각이 잘 안 난다. 사실 어떻게 연주를 했고, 시각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무대에 있는 단원이나 협연자나 지휘자나 생각이 안 난다. 그들이 하나로 모여 또 하나의 악기였다. 개별 존재는 없었다. 그저 지휘자의 방향키에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모두가 각자 맡은 위치에서 그 순간에 내야 할 분명한 ‘음’을 적절하고 귀를 강타하도록 강하게 내뱉었다.
그냥 소용돌이라고 생각하자. 꽃을 피우는 소용돌이.
피워내고자 하는 것은 연꽃이다. 닝펑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는 줄기다. 그 줄기를 따라서 단원들이 각자만의 꽃잎을 피워낸다. 그 흐름에 빛을 뿌리는 게, 방향을 짚어주는 게 롱 유 지휘자였다. 지휘의 손동작이 기억난다. 빛을 흩뿌리라는 듯 손을 작은 영역에서 떨어내며 아래에서 위로 팔을 들어 올리면, 현악의 소리가 아래에서 위로 부드러운 흐름을 타고 강하게 피어난다. 그 피어나는 광경을 직접 목도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3악장이 론도가 있다고 했다. 론도는 돌아오는 주제가 있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A - B - A - C - A →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데, ‘A’가 계속 돌아온다. 그러면 론도다. 3악장에 A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장장 30분 정도를 멍만 때릴 뻔했다. 론도의 첫 음이 돌아올 때마다 정신을 차렸다. 멍… 하니 그냥.
앵콜도 잊을 수 없다.
오케스트라가 사라진 순간에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 줄기는 매 음마다 공명하며 관객에게 속삭였다. 공명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매 소리에 입체감이 있었다는 뜻이다. 유튜브나 다른 플랫폼에서 콘서트 실황 음원을 들을 때 느껴지는, 그 특유의 입체감이 현장에서 실제로 형성되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음색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주듯, 민감한 현과 활이 만나 만들어내는 공명의 소리는 고전 ‘명작’을 실연하는 소리이다.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은 미술관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지금 정지해 있는 상태이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감상함으로써 여전히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형태 자체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다. 클래식은 그 ‘정지된 것’을 다시 ‘재생’시킨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작품이라도, 사람의 손이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악보이다. 서울시향은, 롱 유 지휘자는 머물러 있던 것을 4월 10일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그려냈다. 최고의 한 수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은 사실 무언가를 본 기억이 없다.
롯데콘서트홀 객석 1층 사이드 좌석이어도 무대가 한눈에 보인다. 또 소리도 충분히 위로 치솟아 올라와서 관람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 관객 간의 단차도 충분해서 굳이 앞으로 고개를 빼꼼 내려다보는 거 아니면 협연자의 모습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다 필요 없다. 관객은 무대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단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연주를 펼치고 있는데, 안 보인다. 눈 한 번 안 깜빡이고 마음에 담으려 했는데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남아 지지 않는다. 눈 아래 더 깊은 곳으로 구멍 하나가 뻥- 뚫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심장 혹은 마음이 있다고 추상적으로 명명한 그 상체 위치에 커다란 구멍 안으로 소리가 빨려 들어온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1악장의 특정 부분에서, 우리가 사람인 이상 누가 들어도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막 들어온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시야가 아득해진다. 그런 와중에도 연주가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를 속절없이 투과해 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멍- 하니 소리를 받아내고 흐르는 것을 닦아내고 붙잡아내는 수밖에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던가? 그것도 명작품이라고 했던가? 온몸으로 이해했다.
남들이 백날 천날 이 곡 저 곡 좋다고 여러 번 말해봤자 진짜 진심으로 공감되긴 어려운 것처럼, 그냥 이런 공연장에서, 이 수준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을 실제로 ‘경험’ 해봐야 한다. 듣는 게 아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공연장을 만들었을까? 왜 그 먼 외국인의 노래를 잊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내보이려 할까? 왜? 도대체 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왜 나는 결국 그들에게 설득된 것일까? 왜 가슴을 쿵쿵 내려치면서도 포기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이미 내 마음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 아직 말로 더 담아내기도 너무 무거운 ‘형체’다. 그게 내 어제였고, 앞으로의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