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playlist] 엘리멘탈이 클래식이었다면

[playlist] 드뷔시와 라벨을 따라가보자

by 유진

우리는 왜 영화와 음악을 향유할까? 단순하게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심심하다'는 건 할 일이 없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 빈 공간을 무지갯빛으로 채울 수 있는 것들은 많겠지만,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것이 영화와 음악이다. 많은 사람들의 옆자리에 언제나 이 둘이 함께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다름’과 ‘같음’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삶, 다른 목소리, 다른 방식의 선택들이 펼쳐지면서도, 어딘가 겹쳐지는 감정과 가치, 소리의 결을 만난다. 우리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마음을 이입하고, 내가 하지 못했던 행동을 대신 실행하는 주인공에게 대리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몰입'한다. 몰입은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감각이다. 인간은 무언가에 탐닉하며 살아간다. 사람도, 사물도, 취향도. 나 또한 그렇다. 지금의 나는 클래식 음악에 몰입하며, 내 감정의 운동장을 가장 넓고도 정교하게 확장해나가고 있다. 오늘은 이 취미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새로운 재미를 하나 찾아냈다.


2023년에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을 아시는가? 물, 불, 흙, 공기의 원소들이 함께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를 배경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불 원소족 소녀 엠버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타인의 마음에 민감한 물 원소족 청년 웨이드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사랑을 나누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성질을 지닌 두 존재가 충돌과 갈등 속에서도 점차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다름을 수용하고 진정한 자아로 살아가는 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이끌리고, 성장하는 그 과정을 대사, 인물의 독백, 행동으로 그들의 관계와 심리적 변화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자연 요소가 소재인 영화이기 때문에 영상미 자체도 훌륭해 시각적으로 보는 재미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모두 끝나고 난 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후기를 작성할 수도, 다시 한번 더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리뷰나 숨겨있는 포인트를 서칭 하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 클래식에 영화를 대입해 보겠다!


사실 순서가 바뀌었다. 엘리멘탈을 보게 된 계기는 서울시향의 정기공연 <2025 서울시향 드뷔시와 라벨>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마주한 첫 번째 레퍼토리, 천치강의 오행(五行) 때문이었다. 이 곡은 중국 철학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원소—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금속(金)—을 바탕으로, 각각의 상징적 성격을 음악으로 풀어낸 다섯 개의 짧은 관현악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 이 원소들이 서로를 생성하며 우주적 순환을 이루는 상생(相生)의 질서를 따라 악장이 연결되고, 작곡가는 이를 통해 균형과 관계, 조화를 철학적 사운드로 그려낸다.


애플 뮤직에서 ‘오행’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물, 나무, 불, 흙, 금속을 배경으로 하는 5개의 곡이라 했지? 뭔가 이런 자연물 요소를 활용한 뭔가가 있었는데…. 뭐지? 이 익숙한 소재…. 뭐였지…? 영화였던 것 같은데…. 아! 엘리멘탈! 물과 불의 사랑 이야기! 딱 깨닫자마자 갑자기 궁금해져 영상 플랫폼을 열고 연휴 마지막 날인 오늘 충동적으로 시청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고, 의외로 복합적인 감정을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돌아와 서울시향의 프로그램을 차례로 들었는데, …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과 엠버와 웨이드의 서사 흐름이 절묘하게 겹쳐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천치강의 오행,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벨의 왈츠, 그리고 드뷔시의 바다까지—그 네 곡은 단순한 선곡 리스트가 아니라, 엠버와 웨이드의 감정 여정을 다른 언어로 다시 한번 그려낸 듯했다. 도대체 이 네 곡은 어떻게 두 사람의 서사를, 그 다름과 같음의 흐름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걸까?



천치강 – 《오행》

(Qigang Chen, The Five Elements)

1999년, 프랑스 방송국의 위촉으로 작곡된 이 곡은 동양 철학의 ‘오행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관현악 소품곡이다. 오행은 마치 엘리멘트 시티의 구조를 설명해 주는 음악 같다. 중국 철학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원소, 물·나무·불·흙·금속이 차례대로 등장하고, 각각의 성질을 표현한 짧은 악장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런데 단순히 다섯 개의 분위기가 다른 곡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각 원소가 다음 원소를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 음악도 순환한다.


물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가 불을 일으키고, 불이 타고 난 재가 흙을 만들고, 흙에서 금속이 생기는 순서처럼 말이다. 이 다섯 곡은 마치 감정의 성질표 같기도 하다. 어떤 곡은 잔잔하고, 어떤 곡은 불꽃처럼 튄다. 어떤 곡은 단단하게, 또 어떤 곡은 안에서 무언가 태어나는 느낌을 준다. 엠버와 웨이드가 각자의 성질을 가진 존재로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음악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원리, 그리고 각자 지닌 감정의 근원 같은 것을 말없이 설명해 주는 배경처럼 느껴졌다.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감정도 결국 성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걸 표현하고 나누며 조금씩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mitri Shostakovich, Violin Concerto No. 1 in A minor, Op. 77)

(일전에 추천했던 곡이다!) 1948년, 정치적 탄압 속에 서랍 속에 묻어뒀던 이 곡은 1955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처음 연주되었다. 듣다 보면 엠버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시작은 조용하다. 다만, 이는 참고 있기에 존재하는 고요함이다. 감정을 누르고 있는 바이올린이 홀로 속삭이듯 계속해서 무언가를 눌러가며 연주한다. 2악장에 들어서면 억눌렀던 감정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처럼 리듬이 급해지고, 불협화음이 많아진다. 마치 엠버가 어떻게든 뭐든 잘 해내려고 노력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 금이 가고, 속에 숨겨두었던 마음과 분노가 불쑥 새어 나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3악장은 엠버의 내면을 닮았다. 엠버가 웨이드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미래를 꿈꾸면서도 가족과 전통 앞에서 좌절하는 내면의 모순의 깊은 어둠을 처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에는 나타나지 않은 아주 짙은 영역의 소리가 난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엠버다. 수문이 다시 무너지며 마을로 물이 쏟아지며 가게로 달려가는 엠버의 모습. 그리고 웨이드를 잃고 처음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전면적으로 마주하며 해방에 이르는 장면이 그려진다. 진정한 ‘불꽃’으로 거듭나는 주인공.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3,4악장은 정말 내가 자주 듣고, 또 듣는다. 나는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버전을 이전에도 추천했었으니, 꼭 한 번 들어보시기를!.. 특유의 서늘함!



모리스 라벨 – 고귀하고 감상적인 왈츠

(Maurice Ravel, Valses nobles et sentimentales)

이 곡은 그냥 웨이드다! 그의 분위기를 꼭 닮은 이곡은 1911년, ‘익명 콘서트’에서 초연되었고, 20세기 프랑스 왈츠의 절제된 감성과 색채를 품고 있다. 한 마디로 하면 참 부드럽고 우아하고 따듯하다! 라벨은 여러 개의 짧은 왈츠를 이어 붙여 하나의 곡처럼 만들었는데, 각각의 왈츠가 모두 다르면서도 조용히 이어진다. 어떤 건 조심스럽고, 어떤 건 반짝이고, 어떤 건 울컥한다. 그 전부가 큰소리 내지 않지만 마음을 쓰다듬는 감정들이다. 웨이드는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만 상대에게 그걸 강요하지 않는다. 엠버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그냥 옆에 있었다. 기다려주고, 반응해 주고, 물처럼 흘러가면서도 따뜻했다. 이 곡도 그렇다. 음악이 앞서서 끌고 가기보다는, 함께 걸어준다. 감정을 섬세하게 꺼내 보여주면서도, 끝까지 단정하고 담백하다. 누군가의 진심이 말없이 느껴질 때, 그건 웨이드 같은 방식일 것이다.



클로드 드뷔시 – 바다

(Claude Debussy, La mer,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

1905년, 바다에 대한 시적 상상과 회화적 감상을 오케스트라로 풀어낸 이 작품은 드뷔시의 대표적인 후기 관현악곡이다. ‘바다'는 엠버와 웨이드가 함께 떠난 그 배 아래에서 흐르고 있을 파도만 같다. 드뷔시는 이 곡에서 바다의 여러 순간을 그렸다. 새벽의 고요한 수면, 햇살 속에 반짝이는 물결,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부딪치는 장면까지. 그런데 이 곡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한 게 아니다. 들으면 감정이 물처럼 흐르는 느낌을 준다. 엠버와 웨이드는 갈등도 있었고, 서로 닿지 못할 것 같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결국 둘은 같은 파도에 오른다. 함께 도시를 떠나며,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두 사람. 드뷔시의 이 곡은 그 결말 이후의 감정을 담고 있는 듯하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함께 흐르기 시작했을 때 생기는 변화들. 관계라는 건 그렇게 바다처럼 유동적이고, 함께할 때 비로소 진짜 방향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떤가? 서울시향의 레퍼토리와 엘리멘탈의 이야기가 이렇게 엮어 들어갈지 나도 몰랐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내가 클래식 곡을 듣고 영화를 떠올릴 수 있게 되다니!! 그게 나만의 소소한 재미다. 클래식은 정말 '감정'의 장르다. 다른 매체에서 다루는 인간의 내밀한 영역을 가장 정제되고 깊은 영역에서 다뤄낸다. 엘리멘탈이 두 주인공을 통해 쉽게 말할 수 없었던 마음들을 장면마다 꺼내 보여줬다면, 서울시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장 속에 꾹 숨겨져 있는 감정들을 가사 없는 음으로 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건 어떤 말보다 더 조용하지만, 더 오래 남는 방식이고 초대니까.


이미지: 엘리멘탈 스틸컷 사진 : 월트디즈니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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