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며 완결되는 존재의 아이러니
자연은 무엇일까?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다. 그럼 음악은 무엇인가?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다. 자연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어짐의 조합인 것 같다. 다만, 정의에 따르면 음악은 형식을 다루는 생명체가 도구를 통해 그려낸 감정체니 자연 그 자체라기보단 그 일부라 말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바람에 흩날려도, 바람이 하늘을 지나갈 때도, 물이 흐름을 타고 흘러갈 때도,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 하나에도 늘 음이 있고 악이 있다. 음악은 어떠한가? 자연의 이상적 가치를 동경하는 인간들이 어떻게든 그와 닮은 소리와 가사를 창조해 내고, 향유하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공유시킨다. 자연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 주는 닿을 수 없는 맑은 느낌이 있고 숭고하다. 그 존재가 당연하면서도 가끔은 예고도 없이 범람하는 위력에 무서움을 동반시키지만 우리 곁에 꼭 건강히 머물러줘야만 하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연과 늘 가까이 있으려 한다.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나무가 우거진 곳을 찾아가 산책한다. 탁 트인 강가 옆에서 숨이 벅차오를 때까지 러닝을 하고, 자전거로 더 빠른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환기의 공간이 되어주는 게 자연이겠다.
예술 안에서 자연은 어떨까? 어떻게 표현해도 부족하고, 계속 담아내고 싶은 대상이겠다. 내가 아는 선에서 자연을 가장 잘 그려낸 클래식 작곡가는 드뷔시와 라벨이다. 되게 당연하지만 인간이 어떤 도구를 통해 만들어낸 자연의 형상은 꽤 영롱하고 몽롱해서 사람을 아련하게 만듬과 동시에 그 선율에 귀 기울여 듣게 만든다. 피아노로 달이 내리쬐는 안개를 닮은 은빛을 불러오고, 햇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물의 영롱함을 '소리'로 그려낼 수 있다면 믿으시겠나?
좋아하는 건 자꾸만 닮고 싶고, 붙잡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게 인간이겠다. 물과 달을 내 상상 속에 온전히 소리로 담아낼 수 있다면, 그 능력은 어떤 느낌일까? 그림이나 글을 손가락을 통해서 펼쳐내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부족함 속에서도 어리숙한 나를 담아내기 어렵지 않은 공간이다. 다만, 소리를 통한 예술은 어떠한가? 내 안에서 영감을 피워내기도, 생성해 내기도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다. (비밀인데, 다음 생은 일찍이 살짝 정해놨다. 어떤 사람이든 좋으니 클래식 작곡가로 태어나고 싶다. 머릿속에 하나의 선율이 확 스쳐서 이를 꼭 작품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그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생이 지루하진 않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는 예술인들을 보면 반갑고 더 시선이 간다. 요새 한참 나 자신을 '붙잡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명명하여, 다양한 생각과 소리를 이곳에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하게 현재의 내가 좋아한 무언가를 기록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문장 하나가 내 머릿속에 담겼다. 꼭 강박적으로 모든 걸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까?
오늘 나의 영감이 되어준 arte 전시 리뷰 하나를 소개하겠다. 백정기 작가의 전시 is of의 리뷰 글이다.
본문을 읽어보면 백정기 작가는 자연에서 얻은 색으로 사진을 인화하고, 그 색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작품의 일부로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통제 욕망과 자연의 흐름이 교차하며, '소멸'을 결함이 아닌 예술의 본질로 바라본다. 시간과 흔적, 그리고 사라짐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는 자연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카메라를 꺼내 든다. 기억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라,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되뇌며 언젠가 꺼내 볼 날을 기약하곤 한다. 그런데 만약 사진이 남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기억처럼, 사진도 서서히 흐려진다면? 그런 사진도 여전히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시간이 지나며 색이 흐려지고 사진은 사라지지만, 바로 그 ‘사라짐’이야말로 곧 그가 말하고자 한 작품의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사라져 버리기에 붙잡았는데, 이마저도 서서히 흐려져버리는. 근데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이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 0으로 시작하였으니 다시 0으로 되돌아가는 것. 공연이라는 게 사실 되게 한 순간의 쾌락이 아닌가? 우리의 매일은 어떠한가? 일단 태어나 버렸으니 내가 선택한 행위들을 책임지고, 끊임없이 보장된 안식을 추구하기 위해 애쓰며, 사회적인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면서도 매 순간 검열해야 한다. 그 지겹고 권태로운 흐름을 딱 한 번씩 끊어주는 게 '공연'이라는 가위다.
약 2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완전히 세상의 책임과 이별을 고한 채 작품과 공연의 주체에만 몰입하면 참, 좋다. 멍하니 선율을 들으면서 해결되지 못한 계획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는 사치도 언젠간 누려보고 싶다. (요샌 듣고 각인하기 바쁘니까) 나에게 클래식 공연은 하나의 연극 무대이기도 하다. 인물 개개인 별로 생동감 넘치고 활력이 있고, 바다를 단숨에 몰아올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니까. 이러한 유쾌함과 영감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곳이기 때문에 미련이 가득할 때가 많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지 않은가?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다시 문장 하나를 되새겨 보자. 사라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사라져야 완성된다고? 곧장 어린아이처럼 의문도 제기해 보자. 사실 다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형체가 사라질지 언정, 그 기운과 느낌이 내게 온전히 달라붙잖아. 이로서 완전히 정리되는 문장들을 나열해 보자. 전부를 기억하려고 하지 말고, 충분히 그때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또 놓아주고, 한참 후에 가볍게 떠올려보자. 그때의 감상은 또 다를 테니. 다시 말하지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