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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듣는’ 대신 ‘보는’ 순간

무엇을 '응시'할지는 당신에게

by 유진

희한한 날씨다. 사방에서 스프레이형 분무기가 샥— 뿌려진 듯하다. 우산을 들었지만 손목과 옷깃, 바짓단이 은은히 촉촉해진다. 머리카락은 말할 것도 없다. 짧은 잔머리들이 “나 여기 있어!”, “여기 있어!” 하고 삐죽삐죽 솟아 있다. 내가 이렇게 새싹이 많았던가. (못살겠다)


아마 12시 이후로 비는 그쳤지만, 특유의 미묘한 후덥지근함이 남았다. 다들 느끼셨을까. 오늘은 지하철역까지, 그리고 도착해야 하는 곳까지 헛둘헛둘 걸으며 또 다른 생각 하나를 얹었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접한 바이올린 곡이 오늘의 생각을 열었다. 먼저 소개하는 게 순서겠다. 1분 40초짜리 아주 짧은 곡이다.


러시아 출신 현대 작곡가인 아우어바흐는 클래식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섬세하고 감성적인 음악을 쓰는 인물로, 이 곡에서도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조용히 대화하듯 흐르며,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정서를 자아낸다. 특별한 테크닉보다 음색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들어보면, 예리하고 얇은 실을 천천히 잡아당기는 소리가 실뜨기를 하듯 넓고 둥글게, 조금은 길쭉한 원형의 선을 그려내고 돌아오는 형태가 반복된다. 원의 시작점은 시선보다 살짝 위에 있다. 거기서 조금 상승할 듯하다가 다시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돌아와 다정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33초쯤에는 소리에 무언가 뒤섞인다. 미묘하게 거친 소리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틈새가 벌어진 사이에 노이즈를 살짝 끼워둔 듯하다. 맨 처음보다 눈높이를 맞춘다. 그제야 피아노의 두드림이 선명해진다. 피아노의 음이 조금 더 등장하고, 실낱같은 선이 그어지다 이내 사라진다. 1분 40초 동안 이어지는 바이올린의 흐름이다.


클래식에서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이 장르를 온전히 좋아한다고 마음먹은 이후였을 것이다. 왜 보려고 했을까? 단순하다. 붙잡아 두고 싶어서다. 좋아서,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근본적인 이유는 방금 떠올랐다. “예쁘다.” 그 소리가 참 예뻤다. 무엇이 예뻤는가. 가볍게 피어나 어우러지는 그 모습이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에게 시선이 가듯, ‘예쁜 소리’가 나니까 나도 모르게 귀가 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소리라지만, 보고 싶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는 달라졌다.


공연장에는 음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선명함’이 있다. 게다가 연주자들은 소리를 ‘앞’으로 건넨다.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 형태감과 방향성이 피어오른다. 연주자마다 그려내는 형태는 제각각이다. 속도도, 방향도, 성격도 다르다. 능숙하게 관객을 휘어잡을 수도, 날카롭게 치고 빠질 수도, 한없이 다정하게 물을 수도 있다. 정육면체였다가, 입체 삼각형이었다가, 모서리가 둥근 별 모양이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흐름은 악보에서 시작된다. 작곡가가 지시한 위치에 놓인 음들이 연주자의 손에 붙잡혀 재가공된다. 이를테면 방금 소개한 곡은 어떠한가.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음색이지만, 연주자마다 다르다. 내게는 이 소리가 ‘이명’을 닮기도 하고, ‘기계음’이나 ‘휘파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 곁에 있는 소리를 예쁘게, 예민하게 닮은 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꾹— 눌려지며 흐른다.


나는 클래식에서 음악 자체를 듣기도 하지만, 특유의 음색을 ‘본다’. 연주자가 막 피워낸 소리는 원초적이다. 그러나 숙련된 전문가가 철저히 통제하고 가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초성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잘 훈련된 소리는 연주자의 색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형태를 바라보는 경험을 다른 이도 해봤으면 좋겠다. 클래식을 들을 때 꼭 ‘정답’을 찾듯 음미해야 할까? 그렇진 않다. 음색을 들어보시라. 서로 다른 표현법을 비교해 보시라. 누군가는 잠시 머물고, 누군가는 단칼에 이어간다. 그 미세한 차이를 눈과 마음으로 직접 확인하는 재미는 누구도 대신 알려줄 수 없다. 직접 느낄 때만 온전한 기쁨이 찾아온다.


우리는 왜 음악을 들을까. 잠깐의 기분 환기였을까, 위로가 필요해서였을까. 지루한 일상을 적셔줄 짧고 확실한 기폭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왜 듣는가. 내 생각에 클래식은 삶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순수한 음에서 출발해,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미학적인 요소를 구성해 놓은 청각적 수집품이다. 언어는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지만, 매 순간 소통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말 없는 위로와 고요한 소통이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 위로와 고요함을 받을 것인가. 특정 장소를 추천하는 건 의미가 없다. 마음을 달래는 건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공간을 그려내야 한다. 그리는 도구는 간단하다. 내가 건넨 수집품을 이용해 보시라. 휘파람과 이명 사이의 원형 소리 안에 지금의 들끓음을 담아도 좋겠다. 고단한 하루가 아니던가. 나와 전혀 다른 형태의 것들로 잡념을 지워보길 바란다.



흐린 날이 아니던가.

무엇을 ‘응시’할지는 당신에게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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