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시향 드뷔시와 라벨 (5/16) 리뷰
들어가며
이미 습기로 가득 찬 날이다. 습윤한 분위기 속에서 피어난 물방울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3D 프린터로 장미를 인쇄하다가, 마지막 꽃잎이 생성되기 직전에 작동이 정지된 듯한 순간을 아는가? 서울시향과 지휘자 휴 울프의 라벨과 드뷔시는 어땠는가? 우아하다. 통통 튀지는 않는다.
매사에 라벤더 바닐라의 풍취가 묻어 있었다. 때로는 실체가 아닌 그림을 그리고, 본질을 조용히 드러냈다. 색채감을 갖추기 이전, ‘바다’를 구성하는 소리들이 먼저 들려왔다. 그 바다와 장미는 엮여 있었다. 장미는 미완이었지만, 그 자체로 이미 충분했다. 순환의 밤이다.
천치강(1951- ), ‘오행’(1999)
오후 4시부터 내린 비를 보니, 이미 첫 곡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내가 앉은자리는 1열 C구역 11번. 첼로 연주자들이 바로 내 앞에 일렬로 마주하고 있다. 첼로의 소리는 어떤가? 대지를 닮았다. 가장 밑바닥을 그린다.
물
벼랑 위의 포뇨의 파도와 물방울이 원령공주가 늑대와 함께 살아가던 그 숲을 뛰어올라 든다. 신비하면서도 이질적이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물의 소리가 들린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습윤했던 날이라 언급했으니, 그 수분감은 충분히 전해진다. 호숫가에서 똑- 위로 역행하여 튀어 오른다. 흐르지 않았다.
나무
비가 한참 내려 색이 훨씬 짙어진 통나무 더미들이 둔탁하게 내려앉지 않고, 그 겉표면에 불투명한 막이 둘러싸여 있다. 물방울 위에 튕겨져 토동-거리는 실로폰 같은 소리를 낸다. 마구 쌓여 내려오고 또 상승하는 그 소리가 또 하나의 물방울이었다. 수분감이 80%로 이뤄져 있는 물나무다.
불
불의 기류는 수직이 아닌 수평선으로 쭉- 이어졌다. 매섭고 강렬한 불기운이 아니라, 주황색과 노란색의 언저리의 은은한 광을 띠고 있는 두께감 있는 불이 흐른다. 부드러움으로 도출된 온도감이다. 위협적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사람을 비추는 불이다.
대지
지금까지 지나온 것들이 섞여 들기 시작한다. 이제 기반을 다질 차례다. 물방울과 뿌리내린 고동색의 나무토막, 빛의 둘레를 형성하는 불. 아무것도 없던 미지의 공간에 ‘바닥’이라는 것이 생긴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생겨난 지점이다.
금속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어디서 왔나? 융합의 과정에서 몇 방울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대지에서 스스로 뿌리내린 것이다. 지지직거리는 스파크를 내적으로 품고 있다. 번개의 형태를 닮아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다 번뜩- 생성해 내는 무언가. 수직으로 박힌 것들이 빛을 번쩍인다. 제멋대로 또 거침없이 위로 — 또 아래로 솟았다 내려앉는다. 물질의 탄생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1947-48)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곡이다. 나는 이 곡의 주인공을 정부의 탄압이 끝이 난 이후 칼을 가는 40대 여인으로 설정하였다. 이 곡은 사실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곡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쓴 건 1947년. 스탈린 치하, 예술가들이 “국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탄압받던 시절이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형식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창작 활동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 곡을 써놓고도 발표하지 못했다. 칼을 쥐고 있었지만, 칼집에서 꺼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8년을 묵힌 끝에야, 그가 가장 신뢰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의 손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음악은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 안에는 분명히 저항이 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한 시절, 칼을 갈고만 있던 시절의 기록. 이 곡은 그 시대의 무언의 증언이다.
색채감은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넘어가는 그 중간, 그리고 지직임이다. 흑백 안에 오로지 붉은 입술. 청록색 보석. 그제야 세상에 드러냈기에 드러내는 무언가다. 숙청의 대상에서 행위자로 뒤바뀐 순간의 이야기를 바이올리니스트가 드러냈다. 그 칼의 흐름 안에서 4악장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보자. 이 소리의 흐름은 사포 → 심지 → 얇은 검 → 날로 이어진다.
1악장
기울어진 사포 소리, 지직거림이 내재된 바탕이다. 프로 연주가들은 자기만의 선명도가 깔려 있다. 마냥 속삭이지도 않고, 긴장이 어리지도 않고, 눈물짓지도 않는 선에 머물러있다. 연주자의 눈빛은 매섭지도 유순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활과 바이올린을 높게 드러낸다. 거기서 바이올리니스트의 방향성을 먼저 살짝 눈치챌 수 있었다. 절대 뒤로 가지 않는다. 솔리스트가 충분히 선을 그어낼 수 있도록 관현악은 충분히 배경선을 채워줬다. 너무 그 선에 다가서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안개처럼 머물렀다.
알레나 바예바
바이올린은 확실히 따듯한 계열이었다. 청록색이 은은하게 비추어내는 소리. 그렇다고 뜨겁고 부드럽진 않았다. 다홍색과 청록색이 은은하게 섞여든다. 속도감은 어떠했나? 내게 이 소리가 어떤 갈래로 향할지 생각할 시간을 주진 않았다. 흐름이 빨랐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당연히 향하는 길목에 나도 그대로 따라가게 만드는 뒷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정제되지 않은 칼날 하나를 들고 나와, 현 위에서 8자를 그리며 갈아냈다. 8의 형태는 어떠한가? 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영역에서 금방 튀어올라, 금방 다시 내려앉았다. 현과 활이 계속해서 붙어있지 않았다. 아주 잠깐씩이라도 거리감이 형성되었다. 테츨라프가 끊임없이 휘갈겨 쓰는 필기체였다면 알레나 바예바는 그야 말로 칼을 간다.
매서운 기색으로 연주했다는 게 아니고, 실제로 활과 현을 오가는 모습이 칼을 가는 형태와 엇비슷하다. 조심스럽게 그어내는 게 아니다. 다치는 건 뭐든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손과 칼날이 위험해서 닿아있는데도 8자로 위로 아래로 끊임없이 갈아낸다. 여기서 이 곡의 배경과 겹쳐져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 같다. 왜 칼날을 매섭게 하는가? 행위에는 모든 목적이 있다.
칼의 용도는 무엇인가? 베어내고 겨누기 위해서다. 누굴 향해 겨누는가? 이 칼의 끝에는 민족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탄압자의 목 끝에 겨눠지기 위함이다. 위험한 춤을 추며 그려낼지 언정, 입꼬리 끝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다. 조급하고 갑작스레 내린 결정이 아니라, 응당 때가 되길 기다리며, 가장 앞장서 갈아내는 날이다.
2악장
칼이 모두 갈려졌다. 빛을 받아내어 예리한 기색이 보인다. 만족스러운 형태를 내보이며, 오케스트라 앞에서 칼춤을 춰낸다. 재간스럽게 움직이는 위험한 칼날을 둘러싼 악기들. 유심히 유쾌하게 지켜본다. 뒤를 따르며 바탕을 까는 관현악과 솔로. 앞으로 전진한다. 걸음을 옮기며 한 번씩 베어내는 기색이 보인다. 위익-! 거리는 소리가 광기를 보여준다. 거침없는 발걸음 속에 뒤틀림이 보인다. 늘 미소를 띤 상태임을 잊지 마라. 위협적인 칼날의 내리침과 광대들의 부추김이 마구 뒤섞인다. 어딜 향해 가는가? 붉은 입술만이 번뜩일 뿐이다.
3악장
이 시작 자체가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바닥에서 궁궁- 울려오는 관악의 소리 자체가 네가 이 노래를 안다고 증명해 준다. 내가 마음에만 품어둔 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는데 어찌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저음 위에 바이올린이 올라탔을 때 어떠했는가?
사포의 소리는 이미 날이 되어 있었다. 대각선의 형태를 띄고 신중히 나아간다. 마구 파동 친 것도, 겉선을 매끄럽게 만든 것도 아니다. 아주 얇게 지닌 채 깔끔하면서도 깔끄러운 소리가 관조적으로 향하는 앞선 이다. 여기서 분명히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특징이 드러난다. 절대 뒤로 가지 않는다. 감정 선을 위로 아래로 고저로 향할 때도 아래와 뒷걸음은 없다. 향하거나 위로 올려 보낼지언정 깊이 내려오는 건 택하지 않는다.
선율을 고조하기 위해서 소리를 더 안쪽으로 더 바깥쪽으로 길고 넓게 가지고 놀기보다는 던진 다음, 그것보다 더 굵게 그리고 길게 뻗어낸다. 그래서 알았다. 물러설 수 없는 상황 속에 필요한 투쟁자의 면모가 여기서 제대로 드러났다. 모두가 가질 수 없는 자질이다. 그래서 선봉에 서서 바이올린의 칼날을 드러내는구나. 관현악의 소리가 서서히 사라지는 시점이 있다.
천장에 쏟아지는 빛과 붉은 입술. 청록의 브로치. 칼날 한 자루만이 존재하는 시점이다. 심지의 본체는 사포였다. 사포와 심지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서로 오가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고요한 엎치락 뒤치락에서 칼날이 빛 아래에서 쓰일 운명을 기다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사람들 품 안에 있었다. 내면의 소리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도록 침묵으로 기다리는 관객들과 연주가들. 그 안에서 뒤척이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 전 고요임을 알 수 있다.
4악장
소리가 순식간에 사람을 잡아채었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사람이 이겨낼 거라 생각했지만, 그 한 번의 주춤에서 잡아먹혔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개별 갈등을 지켜보던 소리의 가소롭다는 웃음이겠다. 한 순간의 죽음으로 끊어져 버리는 게 인간의 가소로운 운명이다. 우리는 사실 어떤 고통에서도 전체의 이미지로 봐야 한다.
개별 인간들이 싸워봤자 자연재해 하나로 무너져 버리는 게 이 파리 목숨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칼날을 겨운다고 해도 누군가의 시점, 상황적으로 봤을 땐 결국 상황극 혹은 작은 해프닝이라는 사실이 제삼자의 시선에선 보인다. 어제, 이 곡이 마무리되고 내가 기대한 쇼스타코비치의 그림을 완전히 완성하지 못한 사실이 아쉬웠다. 생각이 흐름이 더 이어질 수가 없었다.
그만큼 3악장까지의 흐름이 완벽한 서사적 완성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행으로 완성된 금속으로 사포질 되어 완성된 칼날에 핏자국이 어려지는 광경을 목도하지 못한건 아쉽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이 또한 하나의 흐름이다. 내가 조종할 수도, 누구도 조종할 수도 없는 결과치다. 사람이 아무리 싸워봤자 '소리'는 잡히는 게 아니고 그때 잠깐 잡혀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앙코르
이자이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오로라' 1악장이었다. 칼을 든 여인과 뒤따르던 사람들의 결말을 목격하지 못한 대신 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아침을 보여줬다. 이 새벽은 여느 평범한 아침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쫄깃하고 리드미컬한 새벽을 본적 있는가? 아침부터 어떻게 그렇게 들뜰 수가 있겠는가.
그날 하루의 시작이 평소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여인이 칼을 갈기 전 기분과 정신을 깨워내는 하나의 준비로 보여냈다. 내 나라의 새벽의 소리는 아니었다. 약간 브라질이나 스페인의 아침 같았다. 진부하게 모든 이야기가 결말을 완전히 종결시켜 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의 시작 이전의 존재를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임을 이번에 알았다.
모리스 라벨(1875-1937), ‘고귀하고 감상적인 왈츠’(1911년 작곡, 1912년 관현악 편곡)
라벨의 왈츠를 듣기 전, 나는 살짝 시니컬한 감정 상태에 있었다. 하루가 지난 지금은 괜찮지만, 본래 계획하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그 순간의 불만은 분명 내 마음을 비스듬하게 했다. 그런 상태로 왈츠를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이 곡은 좋았다. 무엇이 좋았을까?
내가 무대와 아주 가까운 1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기 전의 원초적인 상태에서 도출되는 개별 악기들의 가장 솔직한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층위의 소리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지는지 우리는 보통 인지하지 못한 채 듣게 되는데, 이 날은 각각의 주자들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첼로의 깊은 내리막, 바이올린의 고요한 상승,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았다.
그야말로 고귀하고 감성적인 왈츠였다. 서울시향의 연주자들은 본래부터 여유 있는 연주를 보여주는 분들인데, 이날의 왈츠는 그 우아함이 더욱 도드라졌다. 감성적이라는 느낌은 지휘에서 온 것 같았다. 롱 유 지휘자와 마첼라로 지휘자의 스타일을 겪은 이후로, 지휘자의 손끝에 시선이 종종 닿았다. 이날 지휘자의 손짓은 아주 넓은 8자를 그리며 부드럽고 자주 유연했다.
그 8의 곡선을 구성하는 네 개의 구역마다 소리의 밀도와 감정이 달랐고, 그 미묘한 차이를 눈으로 목격한 것이 인상 깊었다. 두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며 반원을 그릴 때는,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울림이 공간을 채웠다. 이런 적정감 속에서 탄생한 왈츠는, 우리가 클래식에서 기대하는 고상함과 우아함을 정확히 구현해 낸 순간이었다.
클로드 드뷔시(1862-1918), ‘바다’(1903-05년 작곡, 1908년 개정)
곡이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내 감각이 둔해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들을 땐 도무지 ‘바다’가 곧장 그려지지 않았다. 어떤 색감인지도 모호했다. 에메랄드빛도, 푸른 대서양도, 음산한 밤바다도 아니었다.
대신 들려오는 건 ‘바다’라는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결집, 그러니까 바다가 되어가는 흐름이었다. 잔물결, 파도의 시작, 빛의 반사. 바이올린이 수평선을 길게 그어냈을 때, 그제야 하늘과 땅의 경계선이 생겨났고, 음악 속 공간이 열렸다.
특히 2악장은 특이했다. 분명 제목도 「바다」이고, 연주 설명도 들었는데 정작 그 장면이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바다는 실제의 바다가 아니라 ‘풍경화’라는 걸 깨달았다. 직접 젖는 바다가 아니라, 전시된 그림 속의 바다.
「전람회의 그림」처럼, 관객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바라보고 감상할 수밖에 없다. 3악장에 와서야 그림 안에 바다가 꺼내져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리고자 했던 건 물리적인 바다가 아니라, ‘바다’라는 본질 그 자체였다. 색이 입혀지기 전,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구성체로서의 바다. 스케치와 구조, 본질의 사운드.
정리하며
다시 생각해도 이 날은 정말 비가 참 많이 왔다. 어떻게 공연장까지 가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무사히 도달해서 기뻤다. 오늘 길 내내 온 세상에 '수의 순환'이었다. 공연 시작이었던 8시 이전에 이미 시작된 흐름이었고, 어찌 보면 말없이 예고했던 것 같다. 빗속에서 본질을 생각하고, 자유를 감사하고, 왈츠의 춤을 추고, 빗속에서 바다를 생각하라고. 대충, 이런 하루였고,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