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에게 건네는 답장
정말 무더운 날 아니던가? 평소처럼 긴팔 가디건을 챙겨 입고 나왔는데, 멀지 않아 후회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여름이 되어버리다니! 6, 7월엔 내내 장맛비가 내릴 것이라는 말이 마냥 경고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더위한테 완전히 잡아먹히기 전에 열심히 밖을 돌아다녀야 할 듯싶다. 나무 사이를 오가는 재미가 있는데, 벌써 이렇게 땀이 똑똑 떨어지면 어찌하는가? 그래도 가장 무더운 시간에는 실내에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어제오늘, 12시만 되면 책 읽는 재미에 들렸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마무리해서 식곤증도 오지 않으니 활자를 눈과 마음에 담기에 충분했다. 오늘은 어제 궁금증만 남겨놓고 덮어두었던 위화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곡들을 언어로서 서술해 왔던가? 뭔가 다른 포털사이트나 비평을 보면 내가 서술하는 식의 후기는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이 책이 더 반가웠다.
음악을 서술한다. 얼마나 흥미로운가? 클래식은 소나타나 협주곡이라 치면 30분 이상 되는 곡이 대부분이다. 누군가에겐 이 지점이 고통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매우 기쁘고 아쉽다(너무 짧다). 좋은 곡은 1시간이었으면 좋겠다(연주가한테 못할 말인 거 안다). 원체 나는 내 취향에 있는 것은 길었으면 한다는 소망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장편소설집을 골랐던 기억이 있다. 책 가장 뒷면에 나와 있는 내용을 신중히 살펴 내 취향에 맞는 소설을 한 권 찾아내서, 활자를 곱씹어가며 읽었다. 중국 드라마를 좋아했던 것도 막 30편 이상의 회차 수를 가진 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드라마는 넘겨가면서 봤지만...
아무튼, 사랑스러운 것을 짙고 길게 음미할 수 있는 게 클래식이 날 많이 도와주고 있다. 한창 이런 생각이 가득한 와중에 이 책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기쁜지! 이 책은 세계적인 중국 작가 위화의 20편의 산문과 1편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딱 절반은 문학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음악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어찌나 공감되고 즐거운 말들이 가득한지, 읽는 내내 마우스를 딸깍이며 몇 번이나 형광펜 메모를 했는지 모른다. 초중반에는 문학에 대한, 또 문학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나는 내 시야 안에 그 단어를 '클래식'으로 남몰래 대치하여 읽어냈다. 위화가 내게 어떤 문장을 남겨주었을까? 너무 많지만, 몇 문장만이라도 나눠보는 마음이다.
하나, 때때로 문학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기도 한다. 둘, 누가 이익을 얻는가의 문제도 없고 누가 가려지는가의 문제도 없다. 셋, 이 책은 영원히 완성을 기다리지만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짝 열린 책이다. 넷, 비현실적으로 강화된 순수한 기다림 속에 놓여 있다. 다섯, 상징으로 충만하지 않은 곳이 없다. 여섯, 기다림의 모든 의의가 기다림의 실패에 있다는 것이다. 일곱, 무한에 가까운 문학이 때로는 한 사람 안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 한 문단.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에서 박학다식한 보르헤스는 카프카의 선구자를 찾으며 "각기 다른 나라와 다양한 시대의 문학작품에서 그의 목소리 혹은 습관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총명한 보르헤스가 그렇게 한 이유는 결코 카프카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나긴 문학 속에 존재하는 특성인 ‘지속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확실한 열거와 합리적 논리에 이어 보르헤스는 "실제로 모든 작가가 자신의 선구자를 창조한다"라고 알려준다. 이 결론을 통해 우리는 문학 혹은 예술의 원시적 특성, 오래된 품격이 현대 예술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예술 속의 지속성을 끊임없이 실현함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품격이 현대 예술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예술 속의 지속성을 끊임없이 실현한다. 맞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전의 영광을 떠올리고, 추앙하고, 흠모한다. 어째서 이럴 수 있을까?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전달자가 있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 내게 클래식을 전달해 준 건 이미 생을 다하고 떠난 레전드 연주가들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멀지 않은 세대의 예술가가, 내가 택하지 않았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소리를 전달해 준다. 그들은 분명 어떤 사람, 또 다른 연주가가 그어낸, 또 눌러낸 소리에 영감을 받아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이전의 사람이 익명의 한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그 사람은 불특정 다수에게 영감을 마구 전파한다. 이를 수용한 사람은 반복해서 그 예술을 실현시키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 가치를 나누고,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앞에 나열했던 문장 하나를 다시 가져와 보겠다.
클래식이란 이 책은 영원히 완성을 기다리지만,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짝 열린 책이다. 누구나 발들일 수 있고, 닿고 싶지만,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공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정된 자원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허황되고, 때로는 끝이 없는 굴레라서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존재적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더 차분해질 수 있는 것 같다. 사람은 결국 끊임없이 목적과 이유를 찾곤 한다. 생각해 보면,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그 굴레나 과업들이, 생각보다 내가 이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나가기 위해 좋은 숙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만약 내가 정말 하릴없이 목표나 긴장 없이 다른 자연 생물체처럼 오로지 생존을 위해만 살아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무언가를 사고하고 추구할 수도 없는, 생각 자체가 없는 존재.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면 모를까, 이미 수많은 고저와 늪을 지나온 인간이라면 이 선택지가 참 아쉬울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앞선 문장을 가져와 보겠다. 위화는 무한에 가까운 문학이 때로는 한 사람 안에 집중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한번 단어를 대치하겠다. 나는 무한에 가까운 클래식이 때로는 한 사람 안에 집중된다고 하였다.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본다. 왜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는가? 결국 그 끝에는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또 질림 없이 그 자체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끊임없이 안쪽으로 물음표를 던지고, 때로는 비수를 날린다. 무슨 형태이든 관심이 있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람이 생각이 많고,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는 건 호르몬의 영향이나 체력적인 이슈, 혹은 현재의 삶이 지나치게 평온해서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요소를 다 차치하고도, 스스로에게 가장 큰 의문을 던지는 순간에는 어떤가? 세상을 알기 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되짚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때 내게 클래식은 보도블록이 되어주고, 둘레길이 되어준다. 곧장 일러주는 말은 하나도 없고, 때로는 이렇게 사치스럽게 시간과 생각을 이 공간 안에서 낭비해도 되나 싶다. 하지만, 결국 그 끝에 다 달으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들을 나열해 준다. 열정. 기쁨. 슬픔. 해소. 깨달음. 즐거움. 몰입. 그리고 행복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위화의 말을 전달하고 싶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 왜 눈물을 유발하면 안 됩니까? 설마 예술에 감정의 힘이 실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감정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심신을 감동으로 몰아가고, 슬픔이나 기쁨의 눈물을 유도하는 방식이 가장 강력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깊이를 원하지, 공허한 이념적 깊이를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 감정의 깊이를 가장 멀고 아득하게 퍼담을 수 있는 게 예술이고, 내게는 그 예술이 클래식이라는 도구로 다가오고 있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당신은 무엇에 감정의 힘이 실리고, 눈물을 흘리는가? 어떤 것에든 나 자신이 감정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