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사라졌는데, 나는 왜 이토록 쓰고 있는가
아— 이제서야 조용하다.
아직 새벽이고, 목요일이고(방금 전 22일이 되었다).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머리 양쪽이 적당히 띵 하고 울리는 피로감이 감돌고, 눈 언저리에 반쯤 신경질을 얹은 채, 마음속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 시간엔 말하고 싶지 않다. 입을 꾹 다문 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은 시간. 지금은 1시 32분이다.
사실 곧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곧’이란 상대적이겠지만, 7시간은 자야 지하철에서 멀뚱거리며 사뿐히 걸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로선, 5시간 후의 기상도 ‘곧’이다. 고단하다. 모든 친절의 원동력이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이 정말 실감된다. 머릿속이 “지금 잘 시간이야”라고 명령하는 순간, 심장 근처에 있는 감정 담당 부위가 미묘하게 뒤틀린다. 이 순간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겸손치 않게도, 나는 삐쭉한 말들을 툭툭 내뱉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새벽이고,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던지기엔 늦은 시간이다.
이기적이게도,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돌은 재미있다. 아직 위화 작가의 문장이 내 마음 한켠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요즘은 책을 펼치는 시간조차 드물었다. 클래식을 듣는 일만으로도, 그 앞뒤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내가 자주 읽는 이 책(클래식)은 활자마저 없어서, 내가 작가가 되어야 한다. 맘껏 자신을 쏟아내는 등장인물들이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질까 봐, 나는 집중하고 음미하며 내가 가장 잘 아는 언어로 그들을 써내야 한다. 그러니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참 즐거웠다.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클래식을 들으며 느꼈던 감정과 여운, 색채감에 대해 위화도 세세히 다뤘다. 그는 현대 작곡가에서 바흐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대의 사람들 쪽으로 되돌아오는 흐름을 언급했다. 이 흐름 자체가 나와 겹쳐진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대부분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처럼 유명한 작곡가들만 떠올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계에도 저마다의 색을 지닌 사람들이 ‘빡!’ 하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가? 음악으로서보다는 소리로서 클래식을 좋아하는 나로선, 베토벤과 바르토크를 특히 좋아한다. 베토벤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버전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현악 4중주 13번. 바르토크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나타 75번이다. 앞의 곡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지만, 후자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곡이다. 그래서 나는 ‘조각’으로 청취한다. 마치 추상화처럼. 아직 이 곡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연주했는지 정확히 구별하진 못하지만, 그 소리에 어떤 표현이 있는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서 이런 소리도 날 수 있다는 정도는 알게 됐다. 클래식 하나만 좋아해도 내 취향을 세세하게 나눌 수 있다. 이렇게 길게 집중하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위화는 말했다. “아무도 연주할 수 없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노래였다.” 내 방식대로 이 문장을 해석해 본다. ‘아무도 연주할 수 없다’는 건, 이미 현상 안으로 들어온 소리라는 뜻이겠다. 연주는 연주자의 선택으로 펼쳐졌고, 그 순간 공기 중으로 흩어지면 더는 소유할 수 없다. 그 소리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노래’는, 아마도 내 안에 새겨진 빗금일 것이다. 연주자도, 나도 알 수 없는, 다만 가끔 떠올릴 수 있는 조용한 기쁨. 그러나 그 기쁨은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음악의 이치다. 그래서일까. 녹화 영상이 없는 이상, 그 순간을 다시 들을 수 없기에, 나는 매 순간 소리를 값지게 들으려 애쓴다.
다시 그의 말로 이 다음을 설명해 보겠다. “무지는 신비를 구성한 뒤 부름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깊이 빨려들었고, 그 속에서 창작욕까지 끌어올려졌다. (...) 그는 말한다. “나는 늘 삶이 끊임없이 암시를 보낸다고 느낀다. 내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눈짓을 보내고, 나는 삶에서 별 의견이 없는 사람이라 매번 그 암시를 따라간다. 열다섯 살 때 음악은 악보의 방식으로 나를 미혹했고,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는 정말로 다가왔다. (...) 사실 그렇게 순식간에 내가 음악에 빠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문단에서 내가 공감하지 못한 부분은 단 한 줄도 없다. 2025년의 나는, 90년대의 위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이 기쁨은 이미 실존한 것이었고, 나는 단지 그 존재를 눈치챈 것일 뿐이구나. 과거와 현재가 잇닿는 순간은 음악에 빠지는 일만큼이나 갑작스럽다. 무(無)에서 사람을 통해 피어나는 음은 누군가의 요청이자 부름이며, 나는 그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결국 창작까지 이르게 된다. 2024년의 내가 이렇게 키보드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위화의 또 다른 문장으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한다.
“음악은 심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창조하는 것이며,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마음에서 음악이 가진 유래 깊은 사명은 창조, 끊임없는 창조이다.” 이런 음악을 만나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애초에 연약한 마음 안에서 피어난 것에 약하고, 설명할 수 없어 장황한 말들로 어떻게든 받아내려는 나다. 설명 불가한 것들을 붙잡아 쓰는 이 기이한 사명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창조, 끊임없는 창조. 그냥 흘려보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정말 잔인하리만큼 “그런 날이 있었던가?” 싶은 시간이 되면, 미래의 나는 또다시 어리석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조금 덜 우둔한 내가, 지나간 과거를 붙잡는다.
다시 위화의 문장을 듣는다. “목표를 향해 몽유병자처럼 비틀비틀 걸어가지만 자신이 어떤 길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어쩌면 아찔하게 위험한 길일 수 있는데도) 멀리의 불빛을 향해 나아간다네. 그것이 영원한 별빛이든, 매력적인 도깨비불이든 상관없이 말이지.” (...) 중요한 건 그것이 별빛인지 도깨비불인지가 아니라, 그 빛이 예술가의 마음속을 ‘선명하고 확실하게’ 밝혀주는가에 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이 작품이 전혀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느낌을 받았겠나? 따라서 이 작품은 계속 나와 함께였던 걸세. 그런 느낌이 있어야만 창작으로 이어지고, 창작할 때에야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어.” (...) 마르케스는 자신이 그 작품들을 순조롭게 써낼 수 있었던 이유를 오직 하나, “그 구상이 시간의 시련을 견뎌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영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들 덕분에 루벤 다리오의 11음절 시구가 루이스 데 공고라 및 프란시스코 드 케베도와 차별화된다는 것은 안다.”
그래. 결국은 모두가 알고, 나도 알고 있는 결론에 다다른다. “무언가를 하려면, 해야 한다.” 그뿐이다. 그래서 자조적인 웃음이 난다. 인간은 우둔하여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군집화하여 서로의 사회성을 시험하며 살아간다. 그런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는 더더욱 ‘영감’이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각자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위기도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다. 늘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눈에 담아내지 못해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오늘, 내가 내게 맡긴 사소하고도 단단한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