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실내악단 화음(畵音) 토크 콘서트]에서 한강을 논하다(1)

by 유진

1. 끝비

성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 9시 40분이 넘을 무렵인 걸로 기억한다.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여러 개의 물음표와 여지를 맞부닥치고 막 나온 참이다. 소형 초록색 우산을 팍- 펼쳐내어 짧은 샤프심들처럼 내려대는 얄궂은 비 사이 안으로 들어갔다. 통유리로 된 건물로 보폭 넓게 걸음 치는 옆모습이 보였다. 얼핏 스치는 얼굴 표정을 보니 마냥 신나 보이진 않는다. 어딘가 가라앉은 기운이 스스로도 느껴진다. 가끔 너무 좋은 공연을 보면 기분이 팍- 상한 사람처럼 표정이 굳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 입으로 당장 어떤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쌓인 문장이 많고, 느낀 감정이 층층이 들춰내졌는데 공연이 종료됨으로써 마구 헤집어진 마음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내 안에 갇혀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어젯밤에 그 비정돈을 어떻게든 정돈으로 뒤바꾼 채 잠이 들려고 했는데 새벽 1시에는 잠에 모든 시선이 뺏겨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여전히 묵직함이 느껴진다. 담아 온 게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단단한 뭉텅이로 쇄골뼈 아래와 명치 위에 꽉 들어차 있는데 또 한 줄로 풀어내려니 꼭 시작에는 죽을 맛이다. 어제는 한강 작가의 책을 주제로 음악 작품(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등)을 감상하는 토크 콘서트에 다녀왔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을 다룬다는 것 자체로도 발바닥 위에 추 하나를 달아놓은 것 같은데, 거기에 실내악 음악까지 곁들이니 체감상 두터운 책 10권을 2시간 동안 압착해서 흡수하고 온 기분이다. 무언가가 빙빙- 왼팔과 오른팔을 지나 다리까지 채 내려오지도 못했는데, '머리'에 있는 것을 꺼내려니 벌써부터 힘이 든다. 이럴 땐 말미에 실연으로 감상했던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Pärt - Spiegel im Spiegel)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너덜너덜해졌을 때 들으면 좋다고 했다. 이 곡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지만 내가 은연중에 정해놓은 흐름 상 후반부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되니 말을 아껴두겠다.


2. 첫숨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아무래도 첫 번째 곡이었던 바흐를 들으며 입을 떼는 게 좋겠다. 내가 여태껏 경험해 본 공연은 가짓수가 몇 개 되지 않지만 보통 레퍼토리에 바흐가 하나라도 껴있다면 반드시 그 곡은 '시작'을 담당했다. 왜 바흐가 항상 서두를 담당하고 있는가? 이 궁금증에 대해서는 그의 곡이 클래식 레퍼토리에서 '기본 중의 기본'과 '본질'에 가깝고, 연주가의 역량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작곡가라서 그런가? 하고 나 홀로 추측하고 있다.


다행히 이날은 이동섭 진행자가 시작의 이유를 앞서 밝혀주었다. 이 곡은 한강 작가가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시작 전 첼리스트 크리찬 라슨(Chrichan Larson)이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곡으로 토크 콘서트의 문을 여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정했다고 전했다.


침묵으로 형성된 정적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고 있는 첼로의 본체를 바라보는 일은 퍽 즐겁다. 그러면서도 신기하다. 사실 말이 첼로지, 결국 나무가 아니던가? 탱탱하게 당겨진 현에 송진이 묻은 말꼬리가 스치고 손가락의 폭신한 부분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음을 낸다. 현악기 앞판에는 알파벳 f 모양의 구멍이 있는 것을 아시는가? 무대 아래에서 f구멍 사이로 조명이 쏟아지니 그 안쪽이 괜스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f 아래에는 분명 텅- 비어있을 텐데 어떻게 이 사이로, '진중'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소리가 나는 걸까?


순진한 물음이 자꾸만 떠오르니 눈을 팍 감아버렸다. 앞이 캄캄해지니 시끄러운 울림(잡생각)이 잠잠해진다. 다수가 약속한 침묵 속에 첼로 하나가 툭- 놓여 연주가의 숨소리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낮은 것이 오니 별생각도 안 든다. 차분하게,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멍하니 머문다. 오히려 이런 곡들은 내가 뭐라 판단하고 느끼려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안에서 내가 끼울 잔소리는 없다.


바흐를 다시금 되새기며 이날의 토크 콘서트를 떠올려보자. 한강 작가의 대표작들과 각 책마다 어울리는 곡들을 조합해서 관객에게 선사한 공연이었다. 어떤 책들이었나 나열해 보자.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흰』, 『소년이 온다』, 『빛과 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작가가 쓴 작품들의 줄거리를 가볍게 나누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작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눠주었다. 내가 어제를 통해 알게 된 한강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키워드로 나열해 본다.


폭력, 두려움, 솔직함, 담담함, 빛, 온기, 손바닥, 생명, 7년, 과거와 현재, 물음 그리고 눈


한강 작가님을 떠올려보자. 마른 체형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계신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계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그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문장으로 형성되기 전 정리되지 않은 형체가 있겠다. 작가님의 책을 만약 한 권이라도 본 적 있거나 간접적으로 줄거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그분의 글은 상당히 노골적인 폭력이 사실적으로 만연하다. 최소 몇 년 전 독서 모임을 통해 『채식주의자』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이미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단숨에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채식을 한다는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과 인물. 가장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로부터 오는 못된 주먹질이 내 명치를 때려대는데, 너무 불편했지만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버렸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흡입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결말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건, 척추뼈가 보일 만큼 마른 주인공의 뒷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린다는 사실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장면을 그토록 담담하게 그려낸 게 한강 작가다.


3. 가장 못생긴 발

문득 일전에 유튜브로 봤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러셸 셔먼이 또 한 명의 피아니스트 백혜선에게 레슨을 해주며 이런 말을 했다. “너무나 완벽한 연주지만, 다만 그게 문제다. 너무나도 정제되어 있다. 너의 제일 못생긴 발을 내밀어라. 너의 제일 못생긴 발을 내미는 게 네가 누구란 걸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못생긴 발을 내밀어라. 한강 작가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녀도 자신의 서툰 마음을 드러내며 글을 썼을 것이다.


소설가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소설의 막을 내릴 수 있으며, 그 물음에 답을 내리는 것은 독자라고 하였다. 작가가 책을 통해 다루고 있는 주제를 보면 모든 게 ‘끝’이 없다. 끝을 낼 수 없는 아픈 감정의 소용돌이가 넘치는 지점의 이야기들이 가득 녹아 있다. 그 모든 것을 다뤄내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었을까, 하는 연민의 생각도 든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인지 이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물며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 명과 또 한 명, 그리고 또 하나의 이방인을 태어나게 하는데, 모두 내가 말을 붙여줘야만 입을 연다. 그 모든 복잡성을 통제한 채 나의 가장 못생긴 발을 뻗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


이동섭 진행자는 한강 작가의 책을 논하며 자신만의 견해를 나눴다. 작가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가 받아들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모든 인간은 얼음장같이 차가우면서도 아름답다. 어떻게 하면 이 얼음장(폭력, 두려움, 이기심)에 맞서 이 세상을 버텨낼 것인가? 결국 빛과 온기, 그리고 사랑이다. 끝끝내 하얀 것으로 덮일 거라면, 그 덮인 것에는 안온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 삶에서 아름다운 존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미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봤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핸드폰 안이라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만 봐도 일단 나보다 잘난 사람이 전부다. 내가 동양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미적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널렸고, 그들은 항상 나보다는 앞선 단계, 나은 생각, 성실한 현재를 꿈꾼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화면 반대편의 내가 떠오른다. 사람은 결국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는가? 내가 누군가보다 0.1이라도 아래에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부터 자존감은 금이 간다. 그 금이 실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는 치료법과 인간만의 통제력으로 그것이 가짜임을 확인한다. 스친 건 종이 한 장인데, 덮는 건 수천 장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토록 연약할까. 그 수천 장의 역할을 책 한 권이 해내기에 사람들이 문학을, 책을, 그리고 한강이라는 사람의 내면 이야기를 품 안에 두는 것 아닐까? 토크 콘서트를 보고 나서 소개받았던 책 중에 한 권 정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느 시점에 읽어야 할지는 감이 안 온다. 워낙 끝에 물음표와 온점을 많이 남겨 놓는 작가의 책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시점이 아니라서 고민도 된다. 읽게 된다면 아마 『희랍어 시간』이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것 같다. 이동섭 진행자가 『희랍어 시간』을 이야기할 땐, 얼마 전 보았던 연극 <랑데부>가 떠올랐다. 손바닥과 손가락의 인사와 마주하지 않는 손바닥과 손바닥. 손이란 건 가장 당연한 신체 부위지만 가장 부끄러운 영역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손 하나 잡는 게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손끝 하나 닿는다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홧홧해지거나 “그럴 일 없다”라고 확정 지을 수 있는 게 이 부분이다. 내가 내 왼손과 오른손을 부닥치는 것, 내가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는 것, 나와 오래 말을 나눈 사람과 손을 잡는 건 핸드폰을 집어들 듯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행위라지만, 조금이라도 결이 달라지면 손을 내뻗는 길목에서도 심장 언저리에서 말을 얹는다. 희안한 일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 사람. 작별할 수 없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차마 입에 얹기도 무겁고 내밀한 사랑임을 알기에 지금 이 문장을 내뱉는 것도 숭고스럽다. 나는 무엇과 작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동섭 진행자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끝인사를 남기지 못한 채 이별한 순간들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직 나는 무엇과 이별해 보았는가? 나는 정말 너무나도 과분하게도 내게 진심으로 애정을 주는 사람들과 영영 만날 수 없는 이별을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떠남'이 주는 '먹먹함'이 내게는 아직 심장 아래에 박혀 있지 않았다. 체감이 되지 않고, 체감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 가득 떠다닌다. (다음 내용은 6월 1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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