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단 화음(畵音) 토크 콘서트]에서 한강을 논하다(2)
4. 작별하지 못하는 것
나는 무엇과 작별하지 않으려 하는가? 일단 지금 현재의 나와 작별하고 싶지 않다. 근래에 이토록 모든 게 존재하고, 아무 일도 없고 근근이 행복하고, 소소히 슬퍼하고, 내일이 기대되며, 과거를 즐겁게 반추하던 오늘과 어제가 있었던가? 이 무미건조한 평범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또 하나는 내가 보는 장면들을 잊고 싶지 않다. 이 습관은 작년 11월부터 생겨난 건데, 이 기억하고자 하는 욕심이 여러 행위를 이끌었다.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쉽게 망각해버리는 나 자신을 어리석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도통 일기를 쓰지 못했다. 늘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도, 매일 일상을 써야 하는 이유도 찾지도 못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보다 간단할 수 없다. 그날마다 재밌는 일, 슬펐던 일, 신기했던 일을 겪은 ‘나’를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길게 한글로 타닥인 뒤 며칠 있다가 다시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상하리만큼 낯설다. 일단 내가 내뱉은 게 맞긴 해서 익숙하긴 한데, 누가 말한 건지 모르겠다. 자아가 수십 개쯤 있는 것 같다. 오늘 쓴 글을 수십 년의 후에 다시 되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먼 미래의 나와도 이별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또 나는 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사람일 수도 있고, 지금은 ‘소리’일 수 있겠다. 소리를 피워내는 행위도 예쁘다. 음은 시간의 예술이다. 순간의 장면이다. 그림과 달리 녹화되지 않는 한, 매 순간은 곧 이별이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소리를 내는 예술가들을 접하게 되니, 그냥 120분 정도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어떤 공연을 봤고, 어떤 사람을 마주했는지, 내 시선 안에서 당신들은 어떤 울림을 냈는지, 이미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들은 누구인지 되돌아볼 수 있다.
클래식은 뒤돎의 예술이다. 모든 게 내 뒤에 있다. 뒤에서 앞으로 내밀어야 하는 포물선이다. 연주가는 까맣고 하얀 악보를 통해 되짚고, 관람객은 연주를 통해 과거를 마주한다. 옛것을 이렇게까지 반복해서 향유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냥 아름다워서? 그 아름답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이토록 얽매이는 걸까? 과거가 현재를 이렇게까지 뒤흔드는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는 걸까? 이 물음은 아직 내가 답하기엔 이른 질문인 것 같다. 조금만 유예를 두자. 어쩌면 평생 답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5. 끝결
이제 다시 이 글의 본질로 돌아가자. 소개받은 곡들이 있지 않은가. 기억이 남아나지 않기 전에 떠올려보자. 실내악단 화음(畵音)의 연주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첼로 모음곡 5번 중 1악장 ‘전주곡’
김진경 첼리스트가 의자에 앉는다. 침묵으로 형성된 정적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고 있는 첼로의 본체를 바라보는 일은 퍽 즐겁다. 그러면서도 신기하다. 사실 말이 첼로지, 나무가 아니던가? 탱탱하게 당겨진 현에 송진이 묻은 말꼬리가 스치고 손가락의 폭신한 부분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울림을 낸다. 현악기 앞판에는 알파벳 f 모양의 구멍이 있다. 무대 아래에서 f구멍 사이로 조명이 쏟아지니 그 안쪽이 괜스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든다.
f 아래에는 분명 텅 비어 있을 텐데 어떻게 이 사이로, ‘진중’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음색이 나는 걸까? 순진한 물음이 자꾸만 떠오르니 눈을 팍 감아버렸다. 앞이 캄캄해지니 시끄러운 잡념들이 잠잠해진다. 다수가 약속한 침묵 속에 첼로 하나가 툭 놓여, 연주가의 숨소리 사이에서 터지는 낮은 결이 오니 별생각도 안 든다. 오히려 이런 곡들은 내가 뭐라 판단하고 느끼려 하지 말고, 멍- 해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안에서 내가 끼울 잔소리는 없다.
레오시 야나체크 -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3, 4악장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얼기설기 뒤엉키면 이 3악장이 되지 않을까?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도 웃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무언가에 당장 집어삼켜질 것 같은데, 이미 신경과 근육의 기억은 낙인처럼 새겨져 있어 몸은 춤을 추고 손을 얹고 삐걱거린다. 스쳐가는 부드러운 선율은 가면이다. 숨겨져 있는 보라색 핏방울의 아우성이 있다.
그 목소리를 현악기 몇 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다. 실내악이란 도대체 뭘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합이라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내게 야나체크는 대략 20분 정도의 소나타로만 인사한 작곡가였다. 그도 이런 현악 4중주 곡을 써냈구나. 이런 노래가 있었구나. 다른 건 몰라도 3악장은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냥… 일순간에 오는 공포감과 무력감이 곳곳에 내포되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현악사중주 8번 중 2, 3악장
진행자가 말하길,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작곡가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삶의 궤도가 비슷하지 않은가? 스탈린이라는 독재정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는 곡들이 많다. 그 안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 쇼스타코비치겠다.
지금 곡 다시 들으려다 2악장을 반복해서 듣고 왔다. 중독성 미쳤다! 이 리드미컬하면서도 재지 하면서도 무한대(∞)를 활로 끊임없이 그려내는데,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기분 어떡하냐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둥당둥땅! 내질러버리는데 8자 모양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으면서 계속 앞으로 가는 게 딱 당신과 나의 인생살이 같다. 대충 정해놔도 엇갈리고, 되는 거 하나도 없는데, 일단 매일 하루는 반복되고, 얼레벌레 내질러버리는 행동들이 마구 가득한 하루가 아닌가?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위트 있고 유쾌하게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프로코피예프랑 뒤뚱거리는 건 똑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사람이란 정말 재밌다.
4분 33초의 마법이다. 연주자와 관객이 서로의 역할을 뒤집는 순간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무대이며, 저곳이 담아내는 관객석이다. 피아니스트는 고요히 책을 넘기고 뚜껑을 닫으며 연주자를 존중한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연주의 영역에서 발을 뺀 채, 들려오는 것을 들어낸다. 바스락거리는 음, 누군가의 숨결, 종이가 사각 하며 넘어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파열음, 진동… 한 번도 고요했던 적이 없다. 이어지는 연주다. 쇼스타코비치에서 잔뜩 흔들렸던 마음을 이 곡의 서두에서 한 번 정리한다. (울기 싫었는데 살짝 울었다)
이날의 공연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은 이 곡이 아니었나 싶다. 2중주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화라고 했다. 『거울 속의 거울』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한다기보다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는 느낌이 더 강하다. 내면의 흐름을 아주 나지막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감각이다.피아노가 어찌나 다정할 수 있는지 놀랍다. 점으로 된 밑줄을 그어 오선지를 그리는 건반 위로 바이올린이 첫 음을 낸다. 아주 얇고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길. 발을 뗀 것을 아는지 피아노의 왼손이 ‘쿵’ 하고 반응한다. 이 길이 맞다고, 괜찮다고, 손을 마주 잡아준다.
아까 마주했던 하나의 손바닥과 하나의 손가락이 떠오른다. 아름다우면서도 폭력성을 내재한 흰 ‘눈’이 내려오는 장면일 수도 있고, 나체로 누운 몸 위에 꽃이 피어나는 순간의 뒷모습일 수도 있겠다. “제 동생이 더 이상 모독되지 않게 해달라”는 동호 형의 말을 듣고 난 뒤 남겨지는 발걸음일 수도 있다. 내 세상에선 어떤 길목이던가. 아마도 ‘빛을 따라가라’는 조용한 길잡이였을 것이다.
무대 위엔 늘 누군가를 비추는 조명이 있다. 그 하얗고 은은한 빛이 너무도 예뻐서 자주 시선을 머물게 된다. 그 빛을 머금은 사물들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둥글게 튀어나온 피아노 뚜껑의 모서리엔 세 가닥의 빛선이 얇게 흐르고, 바이올린의 나무 몸체는 연주자의 팔 위에서 은은히 움직일 때마다 빛을 작게 반사한다. 활에도 빛이 있다. 고동색의 스틱이 위아래로 수직으로 움직일 때마다 빛은 가운데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활 끝의 은색 스크류가 이따금 반짝인다.
왼쪽 아래로 시선을 더 내리면, 진행자의 간이 테이블 아래 투명한 생수통 하나가 보인다. 물은 반쯤 비어 있지만, 그 안에 일렁이는 빛이 있다. 하얗고 투명한 것에서 은은한 결이 나온다. 포말만 같다. 무대를 더 넓게 바라보면 조명은 공간 전체를 비추고 있지만, 그 안에도 그늘은 있다. 내 발 앞치에 일자로 그어진 검은 그림자. 회색을 닮은 은빛이 넓게 깔려 있다. 연주자에게선 어떤 빛이 나올까? 소리로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천천히 그려내는 활, 그리고 두드려지는 건반. 피아니스트 김보경의 손가락 마디로 서로 다른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짚어낸다. 바이올리니스트 피예나는 어두운 길목의 가로등 같다. 다리를 땅 위에 단정히 세우고, 조급하지 않게 현 위를 오고 간다. 그 자체가 광원의 역할이다.
자연물을 가장 닮은 장르가 바로 이 장르라고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붙잡아내는 것, 그게 악기고 연주자들이다. 있었으나 몰랐던 것들이 빛과 온기로 눈앞에 놓이니 마음이 이상해진다. 만약 모든 태초의 기원이 있었다면, 이 곡의 흐름 안에서 그것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목가적인 느낌을 넘어선 평온함이 있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당신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면, 반드시 이 곡을 들어야 한다.
배동진 - 구릉, 주름이 되어 (화음 프로젝트 Op.181)
실낱보다 더 얇고 사람의 목소리와 닮은 지점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산간의 추위와 능선의 고즈넉함 속에서 펼쳐지는 적막, 그 속에서 피어나는 구릉의 형상이다. 아... 고요하다. 진짜 소리를 듣고 싶으면 현대 쪽으로 가까운 곡을 선택해야 한다. 저 악기가 어디까지 풍경을 묘사하고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이쪽에 조금 더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이래서 악기 연주자들이 현대음악을 많이 좋아하는 걸까?
6. 끝내며
이봐. 얼마나 많은 마음이 길게 담겼는지. 글을 쓴다는 건 정말 긴 시간을 잡아먹는 길인 것 같다. 이 일기장을 쓰는 데도 2시간은 걸린 것 같다. 아마 종이 위에 써야만 했다면 휘갈긴 글씨체에 알아보지 못한 부분이 절반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책도 클래식도 결국 ‘교양’이라 불리는 걸까. 대중음악을 듣고 여기까지 주절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가능하겠지만… 나로서는 당분간 이쪽에만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 얼른 7월이 오면 좋겠으면서도 벌써 6월 중순인 게 웃기다. 시간의 흐름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겠나, 매일 이렇게 쌓이는 마음이나 길게 붙잡아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