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은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악기일지도

[2025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 바이올린 아우구스틴 하델리히_리뷰

by 유진

바이올린은 어쩌면 힘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악기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내린 사람이 이긴다!)

18일에는 서울시향 정기공연 협연자,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했다. 바이올린의 연주 기법은 하나도 모르지만 관심도는 무한대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이 클래스에 신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17일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마스터 클래스가 인상 깊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감이 있던 차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에게 바이올린은 피아노보다는 낯선 존재였다. 작년에야 '소리'가 좋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전까지는 아예 먼 곳에 있는, 어깨에 걸치고 연주하는 악기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내 주위만 해도 러프하게 어떤 현악기를 제일 좋아하는가 물음을 던졌을 때, 주로 첼로나 더블베이스, 혹은 콘트라베이스 같은 종류를 많이 언급했다. 밴드에서 베이스 소리가 듣기 좋듯, 저음의 둥둥-임이 큰 끌림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유독 높게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는 높은 소리를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유년 시절에도 팝페라 가수를 좋아했던 이유가, 팝송을 특유의 성악적 발성으로 높고 길게 노래해 줘서 그런 것 같다. 이제서라도 클래식이 취향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깨달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인생 전반적으로 큰 손해를 봤을 뻔했다.


이래저래 설렘이 가득했던 길이었다. 일단 마스터 클래스가 진행되는 장소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내가 언제 프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습하는 공간에 발 들여볼 수 있겠는가? 장소만으로도 두근거리는데, 세계적인 연주가의 티칭 현장을 목격할 수도 있으니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클래스가 약속된 시간으로부터 대략 15분 전쯤에 도착했는데, 연습실에 발들이자마자 뭔가 더 '고요'하고 '차가운' 공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사람보다 소리를 더 예민하게 붙잡겠다는 목적이 느껴지는? 도서관에 들어가면 문 밖보다 유달리 더 내려앉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 기운이 서늘하게 서려 있던 장소였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구경을 하는 와중에, 오른쪽에는 개인 연습실이 있었다. 누군가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오늘의 레슨 지원자인 것 같았다. 얼마나 긴장될까? (되겠지?) 프로 앞에서 자신의 연주를 1:1로 선보여야 하는데, 두근거림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다. 총 3명의 음악도가 약 35분 정도의 티칭을 받았고, 각기 서로 다른 레퍼토리를 들고 나타났다.


Ysaÿe – Caprice d’après l'étude en forme de Valse de Camille Saint-Saëns, Op.52
생상스의 왈츠 형식 연습곡에 의한 이자이의 카프리스

Wieniawski – Violin Concerto No. 2 in D minor, 1st movement
비에냐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단조 1악장

Ysaÿe – Violin Sonata No. 3 "Ballade"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발라드’


마지막 곡을 제외하면, 생상과 비에냐프스키는 이름과 특정 곡만 알지 처음 들어보는 레퍼토리였다. 이래저래 외국인 연주가의 마스터 클래스는 상당히 바쁘다. 일단 통역이 필요하다. 티칭 멘트가 나오면 바로 통역이 진행되고, 설명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역동적인 오고 감이었다. 이날의 통역은 서울시향 제1바이올린이신 김민정 바이올리니스트께서 맡아주셨다. 소곤소곤 나긋나긋, 나름대로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서 참관객에게 전달해 주셔서 집중력도 올라가고 좋았다.


이제, 비에냐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서 지나온 어제를 떠올려보자.

구노의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화려한 환상곡'밖에 들어본 적 없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그것도 바이올린과 피아노 버전으로 듣게 되었다. 지금은 이츠하크 펄먼의 협연 버전으로 듣고 있는데, 꽤 다이내믹하고 서사적인 시작이다. 베토벤 협주곡이 떠오른다. 나는 그들 사이의 코칭을 통해서 무엇을 느꼈던가? 오가는 대화와 나누는 소리를 듣다 보니, 머릿속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바이올린은 몸에 힘을 빼야 하는 악기인가?"


사람의 목소리보다 악기의 소음을 담아내는 공간의 공기는 잔뜩 날이 서 있고, 환하며, 예민한 느낌이 든다. 처음 내가 연습실이 있는 5층 엘리베이터에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어둑했던 복도였는데, 문이 열려 있는 연습실을 보자마자 순간 주춤했다. 지금 내가 발 들일 곳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옆에 계신 직원 분께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대체로 클래식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공연장—이를테면 예술의 전당, 롯데콘서트홀—만 가봐도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톤다운이 있다. 소리를 가장 우선시하겠다는 그 목적성이 온몸으로 체감된다. 이러니까 옷깃 하나, 가방의 뒤척임까지 사방에 다 퍼지는 것이다. 그런 예민한 공간에서, 협연자라면 가장 맨 앞에, 무반주 공연이라면 가장 중앙에 서서 두터운 침묵 아래에서 소리를 탄생시켜야 한다. 생각만 해도 어떤가? 그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머리가 삐쭉 솟는 일인데, 내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내보여야 한다.


승모근은 잔뜩 치솟고, 어깨는 굽고, 표정은 이상해지며, 몸짓이 어색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20에 있어야 할 마음이 150까지 치솟아, 소리마저 조급하고 치다를 것이다. 무언가 조급하고, 표현하려는 게 너무 어깨 위에 있다. 힘이 많이 들어간 게 보인다.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동안 몇몇 연주가들의 바이올린 소리를 귀에 담아보면서 느꼈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힘이 없다. 소리가 엄청 두터운 수성펜처럼 강한 톤인데도, 힘은 툭— 내려앉아 있다. 숨도 고르다. 가벼운 몸짓의 소리선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쉭— 곡선을 그려낸다. 양팔도, 다리도, 어깨도, 표정도 툭툭— 툭툭— 풀어져 있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사람이 릴랙스 된 상태이니, 소리의 출발점도 긴장됨 하나 없이 듣기 좋은 중앙의 영역에서 편안하게 시작한다. 거기서 누군가는 쨍하게 밀어붙이다가 한순간에 툭! 가면을 바꿔버린다. 여기서도 경극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한순간에 쥐 죽은 듯이 사그라드는 솜사탕을 불러오는 게 이 악기다. 방금 풀액셀로 100까지 밟던 게 확 퍼지(pause)하든지, -180 정도의 숨결로 떨궈져 버린다. 다만, 모든 소리의 중심점은 활과 현 사이를 오가야 하지 사람의 상체 부분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바이올린 연주가들을 보면 가끔 팔을 위로 들어서 소리를 드높일 듯이 액션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 핵심이 사람의 승모근 쪽이 아니라 '소리'에 응집되어 있어서 비로소 음이 악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화려한 패시지라도 나오면 그 날카로운 걸 유순하게 만들어 리드미컬하게 다뤄내준다. 거기다 음색은 어찌나 그렇게 솔직한지. 사람의 목소리 톤만 들어봐도 어떤 감정 상태인지 눈치챌 수 있지 않은가? 바이올린도 그러하다. 이 연주에 임하는 긴장감 하나,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무형으로 은연중에 드러난다.


누구는 막 솜털처럼 흩날리고, 누구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수성매직 같다. 또 다른 사람은 칼날을 갈고, 바늘을 세우며,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흐름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바이올린 연주가들은 마음 챙김 수련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작곡가 안에서 태어난 걸 담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욕심을 차치하고 몸의 긴장을 푸는 것 이상의 안정감으로 예민한 악기를 내 두 손안에 다뤄내야 한다. 바이올린을 시작하는 연주가들은 보통 어린 나이인데, 이 ‘내려놓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어른들도 욕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표현이었길래 바이올린에 마음이 빼앗겼던 걸까?

일단 어깨 위에 힘이 툭- 빠진 상태에서 '선명함'을 띄워야겠다. 좋아하는 소리와 속도감부터 나열해 보자. 너무 조급하면 안 되고, 충분히 기다려주면서 파동 쳐야 한다. 대략 나-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 나— 정도의 간격이고, —의 중간 영역부터는 서서히 사그라드는 비브라토가 있어야 한다. 고저를 깊숙이 파고들되, 비행할 때는 실크 리본이 휙- 날아오르듯 단숨에 뻗어내는 우아한 느낌이 필요하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방향으로 쉭- 상승 곡선을 그리는 형태겠다.


작은 영역 아래에서 시작할 때는 소멸하듯 숨죽였다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흐름이 좋다. 단박에 뻗쳐 있거나 쨍하면 내 마음을 담을 틈이 없다. 반대로, 지나치게 속도를 지체하는 것도 싫다. 충분히 달려나갈 수 있을 때는 맹렬히 앞쪽으로 생동감 있게 휙- 나아가도 괜찮다. 파동을 충실히 이용하되, 감정의 기색이 너무 전면에 드러나면 곤란하다.


연주자의 개성이 지나치게 도드라져도 안 되고, ‘몰입하고 있음’이 과하게 연출되면 듣는 쪽에서 밀려난다. 나는 당신을 통해 작곡가와, 무의식 속에 떠오르고 있는 ‘형상’의 색을 목격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를 보다 투명하게 빛내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붕- 뜰 수 있다. 도전적일 수록 좋다! 난해해도 받아들인다. 진솔하게 다가와주면 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해석이 너무 ‘능숙’하거나 ‘기술적’일 경우, 혹은 지나치게 음색이 ‘따듯’해도 잘 끌리지 않았다. (취향의 영역이다)


솔직함에서 비롯된 해석이라면 다 좋지만, 조금이라도 ‘버터’스럽다면 듣기 어렵다. 연주가가 곡과 무대 위에서 ‘초연’ 했으면 좋겠다. 겸손한 마음으로 내게 어깨 위로 ‘소리’를 앞세워 주면 좋겠다. 나는 충분히 당신의 해석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 꼰대적인 것 같다. ‘소리’와 ‘음악’보다 ‘사람’이 압도적으로 드러나면 듣고자 하는 마음이 확 접힌다. 최애나 궁금했던 연주자가 아닌 이상, 나는 사람을 보러 공연장에 가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소리’가 내 문을 두드릴 때, 비로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이제와 보니, 공연장 밖에서 마주하는 바이올린은 제 성격을 삐쭉— 내보이는 들고양이를 닮았다.

그렇게 예민해 보일 수가 없다. 저 악기가 왜 다루기 어려운 나무인지 새삼 체감이 되었다. 소리 표현이 다양하고 넓은 만큼, 그 뒤편에서는 얼마나 어르고 달래고 친해지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할까?


오히려 피아노보다 그 연주하는 사람이 의도하는 바를 지나칠 정도로 명확히 반영해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을 짚는 손일까, 활을 든 손일까? 내가 알 수 없는 길이지만, 조금만 엇나가도 머뭇거려도 뚝— 인정사정없이 뒤돌아버리는 게 이 고양이겠다는 걸 확연히 눈치챌 수 있었다.


마스터 클래스라 그런지 테크니컬 한 영역보다는 주의할 점이나 구간별 해석의 영역에 관해서 많이 논했던 걸로 기억한다. 특정 부분을 조금 더 음악적으로 표현하라, 조금 더 왈츠적으로 해봐라 등, 뭔가 작곡가가 의도했던 방향의 감정선과 캐릭터성을 분명히 보여주면 좋겠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확실히 연주가의 멘토링이 스며든 구간은 조금 더 ‘음악’이 되었다. 삐쭉 솟아있던 승모근을 살짝 툭툭— 두드려 놓고 ‘왈츠’도 춰보고 ‘발라드’도 해보고... 연주가가 직접 시범을 보일 때는 확실히 시작이 초연하다.


가수와 아마추어 일반인의 노래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가수는 발성이나 호흡 자체가 일반인보다 확연히 남다르다는 게 탁— 느껴진다. (이를테면 가수 소향이 첫 소절을 떼면 느껴지는 감각처럼) 분명 소리 100이었는데, 공기반 소리반으로 연주가 흘러간다. 약간 제멋대로인 동물(바이올린)이 조련사 앞에서 순식간에 얌전하게 훈련받는 느낌처럼.


어려운 악기다.

들을 때는 편하게 들었고, 다뤄내기 어려운 악기라는 이야기도 이론으로만 들었지, 이걸 소리로 표현하고 다듬는 과정을 이렇게 직접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티칭 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도 많았다. 다만, 그냥 소리로 추측하기에, 조금 더 감정적인 영역에서 다채롭게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작곡가의 의도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더 드라마틱하게 흐름을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식으로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타임의 연주가께서 들고 오신 곡은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이었다. 내 글을 몇 번 확인해 주신 분들은 아마 내가 이 소나타 전곡과 얼마나 친분이 깊은지 아시리라. 나는 이 전곡을 듣다가 살짝 귀가 트였다. 이 들고양이 같은 악기가 어디까지 춤을 추고, 울 수 있고, 흘러갈 수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또 난해하게 다뤄낸 곡들이다. 그중에서도 3번 ‘발라드’는 꽤 많은 연주가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드라마틱하고, 싸늘하며, 무대 위에서 들었을 때 장악력이 뛰어나다.


작년 11월에 들었던 이자이 3번의 느낌을 가져와보자.

차분하게 시작되며 차갑게 울려오는 소리. 그리고 잠시 사라진다. 아래쪽에서 시작되어 위로 서서히 퍼져가는 감정. 충분히 아래에서 기다리며 마음의 고동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 번져오는 것들 사이로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 차갑게 찔러오지만 그 안에 짙어진 복잡성이 느껴진다.

마치 갈등을 겪고 있는 두 사람의 ‘발라드’를 듣는 듯한 기분. 감정을 충분히 타고 흐르는 연주. 화려하지만 동시에 창백해지는 소리. 고요히 갈등하며 지나가는 선율이 점차 고조된다.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지만 아직 눈에 띄지 않는. 점점 다가오는 파동. 차갑게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지만 그 선을 지켜내려는 절제가 있다. 그러나 점점 참을 수 없게 타오르며 치고 들어오는 매서운 선율. 짙은 서정성이 가득한 음색이 인상적이다. 충분히 음을 찍고 내려와 화려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동하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는 연주였다.

임동민 바이올린 리사이틀
코리안 영 아티스트 시리즈 Ⅳ : 이자이_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중 제3번 소나타 "Ballade"


연습실 앞에 도착해서 이 곡이 문 앞에 부착되어 있는 용지 위에 적혀 있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클래식 공연을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곡을 만나면 정말 신난다. 낯설어할 필요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이 연주가는 어떤 해석을 보여줄지 기뻐하며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지원자였던 진영훈 vn(바이올리니스트)은 어떤 이자이 3번을 내보였는가?


내가 들었던 (두 가지 버전밖에 안 들어봤지만) 이자이 중에서 가장 불꽃 로켓 같고, 재지(jazzy)하고, 특이한 소리 곡선을 만들어냈다. 어딘지 정확히 묘사할 순 없는데, 특정 구간에서 아래에서 위로 소리를 좌장—! 하고 쫙 파워있게 그어버리는데 내가 아는 ‘발라드’가 맞나 싶었다.


귓청을 확확— 때려버리는 타격감이 연주자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데, 이런 스타일의 연주가였구나, 확실히 각인할 수 있었다. 워낙 스타일이 특이해서 독특했는데, 연주가가 “이 곡이 왜 발라드인지 잘 공감이 안 된다”라고 질문하는 것을 보고 이해가 되었다. 사람의 특성 자체가 이렇게 잘 반영되는 악기라니,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면서도 진영훈 vn의 생각에 조금이나마 공감되기도 했다.


연주가는 무조건 작곡가의 말을 따라야 할까?

해석이 이해되지 않을 땐 어찌해야 할까? 나만 해도, 이전에 현악 4중주 공연에서 하이든의 ‘사냥’이 왜 ‘사냥’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너무나도 귀족적이고, 위선적일 만큼 평화로운데 이게 사냥이라고? 신기했다. 나라면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하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해가 안 되네…’ 싶을 것 같다. 연주가의 입장에서 이런 아이러니가 내적으로 발생하면 어떨까? 작곡가의 지시에 충분히 임하려 할까, 아니면 도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들이밀까?


재밌는 영역이면서도 너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놀 때는 일부러 틀리고, 굳이 다르게 표현하는 장난도 해볼 수 있겠지만, 작곡가의 노래를 마주하러 온 대중 앞에서는 어느 정도 ‘규율’을 지켜줘야 할 테니, 통제력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6시 30분이 가까워졌을 무렵 클래스가 끝났고, 간단한 질의응답이 오갔다. 어떻게 하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어깨받침(shoulder rest)에 관한 질문도 많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연주가의 팬도 많았고, 바이올린 전공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역에 머물고, 다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 새삼 체감되었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가 들었던 곡이 얼마나 고난도의 스킬과 감정선이 필요한 곡이었는지, 이런 클래스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니까 클래식을 단순히 ‘곡 하나’, ‘악장 하나’씩 듣는 게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소리의 시작점을 탁— 붙잡고 연주자랑 같이 리듬을 타는 재미가 있음을 아는가? 그 실선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흐를 수 있는지, 댄스를 하는지, 아리아를 부르는지 지켜보면 공연의 한 순간이 1분처럼 느껴진다.


매 순간이 아쉽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인데, 내게 클래식은 매번 먼저 떠나가버리는 존재다.

하지만 상관없다. 늘 그렇듯 다시 되돌아오는 것도 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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