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을 찾아 골든베르크 위를 걷는 마음
1. 굴절된 원형 —빗금이 새겨진 것 위에서
이를테면,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이겠다. 우리가 가장 평온하다고 느끼는 감정선 위에 다시 두 발을 내딛기 위함이다. 어디로 굴러 떨어졌길래 뒤돌아보는가? 감정의 낭떠러지, 혹은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전지대에서 완전히 밀려났을 경우겠다.
이런 갑작스러운 추락이 무서운 점은 예고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든, 발생할 '상황'은 어떻게든 주어진다. 내가 굳이 발을 빼내어 모른 척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쌓여가는 과업과 당장 해결해버리고 싶은 욕심은 그렇게 묻어가는 선택지에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풍선을 바늘로, 아니 날로 그어 냈다면 '펑' 하는 소리를 듣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단 한 번의 순간이지만, 그 폭발력은 상당하다.
원하는 대로 일을 내질렀다고 후련해진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니 상관없다 식으로 일관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소리까지 무덤덤하게 여길 만큼 맷집이 강하진 못하다. 날을 손에 들어낸 것 자체부터가 내 '원형'에는 큰 빗금을 냈다. 우선순위에 따라 택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을 자갈길 뒤로 재쳐두었고, 맨발로 걷다 돌에 긁힌 상처가 울그락거린다. 잠시는 따가운 줄 몰라도, 조금만 고요해져도 따끔거리는 표면이다.
이래저래 갉혔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 딱지가 질 때까지도, 새살이 돋을 때까지는 침묵과 거리두기 품 안에 스스로를 가둬둬야 한다. 다만, 이 또한 좋은 방법은 아니다.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생긴 상처는 '고요함' 아래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 흉으로 굳어버린다. 괜찮은가? 싶은 순간에 갑자기 내가 혼자임을 직감하면, 주변 소음과 상황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핏방울들이 불쑥 머릿속 말소리로 흐느낀다. 휴지로 벅벅 눌러봤자, 지나온 시간이 부족해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냥 방관한다.
하루마다 서로 다른 해소의 역할이 있다. 흘려보내는 날이 있어야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날도 있다. 사람이 매일 슬플 수 있나? 그렇기엔 그것 외에도 행복한 것은 주변에 포진되어 있다. 내가 내 마음의 고통이 너무 날 서 있기에 마주할 수 없을 뿐이다. 나 혼자 슬플 뿐이고, 내 슬픔은 오로지 나만이 감당할 일이다. 타인은 내가 얼마나 감정적인 파도에 마주해 있는지 누구든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없고,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욕심이다. 결국 내가 나를 비춰내어 이끌어내야 한다.
6월이다. 뭔가에 잠식되어 허송세월하기엔 바람은 나뭇잎을 흩날리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은 싱그럽다. 나와 개별 존재인 타인으로 인해 내 시간과 시야를 어둠으로 잠식시킬 수 없다. 내뱉은 자보다 목도한 자가 더 긴 시간을 슬퍼하는 일은 내 세상에선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나는 언제든 나를 '비추는' 방향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원형'이 딱딱한 '네모'로 변하기 전에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나는 속도를 재촉하고 싶었다. 정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슬픔을 오래 묵혀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숲길을 거닐 때 철없이 행복해하는 나로 '하루빨리' 되돌려 놓고 싶었다.
다만, 쉽게 손 뻗을 수 있는 곳이 '클래식'밖에 없었다. 원래 이곳이 감정의 파도가 흐르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나보다 더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의 무의식을 왈칵 꺼내놓은 일기장이 클래식이다. 교훈이나 위로가 필요해 책을 손에 펼쳐놓는 것처럼, 나는 소리로 마음을 비춰줄 사람을 찾아 이래저래 헤맸다.
그토록 좋아하는 현악기에 문을 두드렸는데 이상하리만큼 위로가 안 됐다. 나는 저 밑바닥 돌길 위에 서 있는데, 바이올린은 하늘을 부드럽게 노닐어 주니 그 거리감에 온전히 내 것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리기 직전, 바흐의 ‘골든베르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곡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그리고 강렬히 떠올랐다.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 Goldberg Variations, BWV 988 (골든베르크 변주곡)
한밤중, 음악이 잠을 달래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귀족이 심야에 들을 잔잔한 음악을 바흐에게 부탁했고, 바흐는 젊은 제자 '골든베르크'가 연주할 수 있도록 이 변주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이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면 마치 꿈처럼 시작해서, 여러 가지 감정의 풍경을 지나 다시 고요한 아침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떠난 기분이 듭니다.
처음에 선율 하나(‘아리아’)가 등장하고, 그 위로 총 30개의 변주가 이어집니다. 단순한 멜로디가 어떻게 이렇게 다채로운 성격을 갖게 되는지 신기할 정도로, 밝고 장난스러운 변주부터 깊은 고뇌에 찬 듯한 순간들까지 펼쳐집니다. 어떤 변주는 춤추듯 가볍고, 어떤 변주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하지만 끝에 가면 다시 처음의 아리아가 돌아오며, 모든 것을 품듯 마무리됩니다.
제일 처음 아리아가 등장하고, 그 위로 30개의 변주가 이어지는 곡이다. 딱 처음에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회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아가 좋다. 그다음부터는 비슷한데, 좋긴 한데… 뭐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구슬이 굴러가는지를 모르겠다. 들어야 할까? 가요를 듣는 게 낫지 않나?" 식의 낯선 거리감이 든다.
바흐의 곡이 꼭 이렇다. 유달리 체계적이고 정해진 규율성이 느껴진다. 내 삶이 규칙적인 건 좋지만, 괜히 클래식은 변주와 난해함이 깔려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했던 요즘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흐름이 특이하다가 갑자기 예뻐지는 선율을 자주 듣다 보면, 하이든이나 바흐가 오히려 힘들어진다.
당신이 만약 피아노에 관심이 있거나, 유명 연주가의 영상을 통해 이 곡을 접해봤을 수도 있다. 이 곡은 꽤나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그 ‘유명’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꼭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꽤 자주 찾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일 텐데, 왜일까?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도 그 명성에 걸맞은 감상을 주는지는 미지수다.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도 이 곡이, 최소한 당분간은 친해질 수 없는 미지의 곡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요 근래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마스터 클래스나 김도훈 피아노 리사이틀을 다녀오면서, 피아노가 띄워내는 '유리구슬을 닮은 물방울' 같은 소리를 귀로 느끼게 되면서 하나둘, 음색을 살리는 곡들에 조금씩 시선이 닿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동그랗게 비상하는 것들을 듣다 보면 마음이 정돈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 작은 생각 하나가 그날, 골든베르크를 떠올리게 해 줄 줄은 몰랐다. 당신이 저 곡을 듣기로 마음을 먹고, 아리아를 지나 변주곡 1번부터 듣기 시작했다면, 소리구슬들이 어딘가로—동당동땅—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프를 하며 규칙적으로 흐르는 것이 느껴지실 것이다.
2. 건반 위 —되돌아가는 마음, 사라지지 않는 원형
아리아다. 향하는 소리다. 닿고자 하는 길은 알려주지 않지만, 나와 손깍지를 꽉 껴둔 채 어린아이처럼 함께 발맞춰 리듬 위를 걷기 시작한다. 멈추려는 기색 자체가 없다. 이미 올라탔기 때문에 내려온다는 선택지는 없다. 내가 한참 정지해 있었다는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충분히 딜레이 된 시간만큼 따라잡아주겠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변주곡 4번에 다달아보시라. 이토록 상냥한 미소일 수가 없다. 얼떨떨한 내 모습을 보며 살짝 웃어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매 순간이 장난 같으면서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의문을 가지기도 어려운 길이다. 변주곡 5번에서는 모든 잡념이 사그라든다. 온 세상이 빛 안인데, 상념이 존재할 길이 있는가?
이제는 빙글빙글—원을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6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어느새 익숙해진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난다. 이제는 내가 살짝씩 발을 먼저 뻗는 타이밍도 있다. 7이다. 성급해진 나의 숨을 천천히—천천히—들이마시고 내쉬는 시간이다. 나아감에 있어서 ‘순간’의 현재를 인지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시간이다. 걸음이 빠르다고 해서 마음까지 다급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휙—8번이다. 숨을 고르게 쉬었으니 다시 앞질러 가야 하지 않겠나? 아까 말했지만, 며칠간 뒤처진 만큼 속도를 붙여야 한다. 이제는 나도 붙잡힌 손을 살짝은 마주 잡을 수 있다. 익숙해진 9번, 4번이 떠오르는 가벼운 발걸음이다. 뒤동땅땅거리는 11번이다.
계단도 나오고, 미끄럼틀도 가볍게 올랐다 내려오는데 어쩌겠나. 따라갈 수밖에. 이제는 리듬을 바꿔서 두 발은 두 발, 한 발은 한 발. 조금 더 변주를 줘보자. 한쪽 발에는 더 힘을 줘보기도. 강조해 보자. 이 땅에 발자국은 몇 개든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자, 다시 숨 쉬는 13이다. 지나온 발자국도 돌아보고, 고개를 들어 새파란 하늘도 눈에 담는 시간이다. 잘 들어보면 새가 노래하는 따라라랑—목소리도 들린다. 반복적인 노래가 있다. 마음의 부분으로 기억해 보자. 둥—둥—왼손으로 조용히 뒤따라오는 그림자도 있다. 항상 함께하고 싶은지, 중간부터는 다른 춤을 추기도 한다. 밤하늘도 보인다. 은하수가 옅게 흐르는 정취가 보인다. 이때야말로 눈을 감을 때다. 별이 나풀거리는데 멍해지지 않을 인간이 어딨겠는가?
그 순간 14가 온다. 별무리의 축제다. 호숫가가 일렁이며 파도를 닮은 기색을 뽐낸다. 갑자기 나를 잡아챈 것이 그 수면 위로 뛰어오른다. 빠진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내 발끝은 이미 차가운 물기운 위에 얹혀 있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지 않았다. 그 자체로 마음 안에 새로운 번개 하나가 스친다. 이 세상은 어딘가? 보다 빠른 속도감으로 물방울 위를 마구 쏘다닌다. 자유의 몸짓이다.
기쁨이 어떻게 영원하겠는가? 재밌는 시간도 저무는 15다. 고요히 잠에 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잔잔한 조언이겠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내일 또 재밌게 놀자고 다정하게 일러주는 목소리다. 아직은 눈을 감고 싶지 않으나, 만져지는 이불이 무겁게 나를 눌러온다.
이젠 꿈속 안에 있는 16이겠다. 꿈 안에서는 또 두 발이 자유롭다. 나를 잡고 있던 깍지 손도 없다. 뛰어놀 평지와 온화한 공기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 뛰놀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들풀들이 재촉하는 소리들이다. 여기 온 애들을 난 늘 지켜보고 있었지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보여내는 17이다. 나라면 절대 못 했을 재간스러운 걸음걸이가 자동으로 나온다. 14의 나다. 호숫가가 아니더라도 이젠 괜찮다. 기쁨의 춤사위를 알지 않았던가? 앞으로 계속 뻗어내는 손짓과 발짓 안에서 나는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밤하늘 아래에 놓여 있다.
사그라진 18이다. 신이 난 틈새의 사이에서 인적 없는 반딧불이들이 가득한 숲 안으로 들어선다. 온통 노란빛이 곳곳에 공기방울처럼 둥둥—떠 있다. 나무 기둥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맨발로 차가운 흙바닥을 오간다. 그 싸늘함이 이곳에 ‘걷고’ 있음을 인식시킨다.
19다. 다시 속력을 내야 하지 않겠나? 나를 놓아주었던 손길이 다시 마주 잡아준다. 헤매지 않도록 이끄는 길이다. 내 따듯한 손을 붙잡는 시원한 기운이다. 이 길이 맞다고 굳이 묻지 않아도 그 길이 맞음을 저 뒷모습으로 알 수 있다. 20이다. 리듬을 다시 바꾸자. 재즈스캣 같다. 한 손은 미끄럼틀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한 손은 구간마다 도장을 찍는다. 때로는 발을 서로 다르게 맞춰가며 불규칙함을 받아들인다.
굳이 발의 합이 착착—맞아야 할까? 아니, 전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디딛는 맛이 있다. 재밌는 시간이 순식간에 21에서 사그라든다. 갑자기 모든 게 사라졌다. 들푸른 대지도, 나를 붙잡아주던 것도 아스라이 소멸했다. 갑자기 온 공간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아리아보다 이전의 나를 일순간 목도한다.
방금까지 즐거워했던 게 ‘가짜’만 같고, 돌아온 길에 내가 했던 모양새가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무의식의 영역임에도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부질없는 물음이 떠오른다.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거리며 느릿하게 앞으로 간다. 숨을 곳도 없으면서 몸을 가릴 수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몸짓이다. 통나무 하나를 발견한 22다.
그 나무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아 본다. 이래저래 부질없는 생각들을 던지고, 내 앞보다 더 너머에 시선을 던진다. 아직도 밤이다. 낮이 오긴 하는 걸까? 소리 자체가 이미 은하수를 품어내어 낮을 그려낼 수가 없다. 심드렁한 얼굴로 무릎 위에 팔을 얹은 채 턱을 괸 모양새다. 입이 삐쭉 튀어나와 있다. 이젠 불만도 표현할 수 있구나.
그 마음을 눈치챈 23이다. 나를 놓고 사라진 것들이 친구를 데리고 내 앞에서 종알거린다. 사람이 아닌 형체들이 조근거리는 목소리가 나름 듣기 좋다. 고개가 저절로 좌우로 왔다 갔다 춤을 춘다. 툭 튀어나온 입이 어느새 쏙 들어간 채 입꼬리를 힘껏 들어 올리고 있다. 바보. 이렇게 순진하고 단순해서 어떡하겠나?
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된 24다. 엉덩이에 붙은 흙은 툭툭 털고 다시 천천히 가던 길을 간다. 이젠 뒷짐을 지고 익숙하게 넓은 보폭으로 걷는다. 주변도 살짝씩 돌아본다. 이런 게 있었구나.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담기기 시작한다. 아래쪽에도 시선을 던져본다. 발치에 있는 귀여운 것들이 종종거리며 나를 피해 왔다 갔다 길을 오간다.
마냥 걷던 와중에 우뚝 멈춰서는 25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모양새다. 보이는 듯하면서 너무 멀리 있어, 눈을 찌푸려봐도 형체가 정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궁금하면서도 낯선 느낌에 닿기가 영 어렵게만 느껴진다. 저곳이 혹시 내가 닿을 끝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전보다 조용한 기색으로 차분히 그쪽으로 방향을 옮기기 시작한다. 조심스럽지만 느리진 않은, 그런 기색으로. 갑자기 탐색하듯 다가가는 내 곁으로 손깍지를 낀 그 아이가 내 손을 낚아채 달리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속도감에 놀라긴 했지만, 끌려가진 않는다. 이젠 나도 널 알아. 그 리듬에 맞춰 발을 맞추면서도 앞에 보이는 것이 점차 가까워지는 모양새에 살짝씩 불안해진다.
흙길이 갑자기 정제된 길로 깔려 있다. 이젠 모난 바닥은 없다. 내가 아는 아스팔트 길 같기도 하다. 익숙한 소리도 들린다. 자연의 요소가 아닌, 어딘가 정해진 규율성의 리듬감이다. 오르고 내리는 게 마치 정해진 순번대로 돌아가는 신호등과 같다. 갑자기 종이 울린다. 28이다. 빠른 기색이다. 내가 거의 다 왔음을 알리는 누군가의 예비 알림 같다.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어! 갑자기 온 세상이 나를 반기고, 성급한 인사를 해대니까 나까지 흥분된다. 여기가 어디야, 어딘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갑자기 쿵! 29의 변주다. 팡파레가 울리고, 28보다 더 빠르다! 내가 지금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마구 빙빙 돌고 기뻐하니까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근데 일단 마냥 기쁘다. 왔다잖아! 내가 도달했네! 와 어디지? 어딘데! 알려줘!
마냥 물어도 대답이 없다. 뭐지? 이제는 답을 확인하라는 듯, 함께 숨을 골라주는 30이다. 그동안 만났던 것들과 인사를 나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여기까지 오는데 함께 했던 것들이 전부 내 곁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토록 따듯할 수 있나? 이처럼 빛날 수 있나? 마음 안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기쁨과 성취감이 나를 잠식한다. 그리고 고요한 하나의 음표와 종결이다.
아리아다. 마침의 소리다. 모든 동적인 것들이 사그라들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그토록 향하던 길이 결국 되돌아오기 위한 길이었다. 점에서 시작해서 다시 점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돌아올 것이면 왜 향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달뜬 내 숨소리가 먼저 들린다. 아까와는 다른 시원한 기색이 마음 안에 가득하다.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고, 머리카락은 엉망이다. 그런데 눈이, 눈자위가 다르다. 무겁게 눌러앉아 있던 것이 사그라들었다. 발끝을 들어본다. 어느새 딱지가 앉은 발바닥이다. 뭐지? 이 30번의 한 바퀴는 결국, 나를 어디로 되돌려 놓은 것인가?
3. 구슬 위 —다시 원점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골든베르크는 나를, 내가 아는 ‘나’로 돌려놓았다. 어두컴컴한 과거의 두터운 상처 아래에서 눈을 내리깐 채 뚝뚝—무언가를 흘리며 뒤로 잔뜩 밀려난 나의 손을 잡아채, 원래 있던 원점의 0 위에 다시 세워놓았다. 그로써 제자리가 되었다. 아무 일도 없던 상태의, 무념의 시간으로 턱—하니 되돌려 보낸 구슬들이다.
나는 내 안에 나를 비추는 ‘원형’ 하나가 있다고 믿는다. 그 원형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점차 빗금 쳐져, 어느 순간 ‘네모’처럼 경화되기 시작했다. 꼭짓점이 생기려는 찰나, 표면이 딱딱하게 굳기 직전에—바흐가 건반 위로 굴린 구슬이 내 안의 것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피아노로 굴려낸 그 물방울들은 함부로 터지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튕겨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30번의 흐름, 그리고 2번의 원점이었다.
그 서로 다른 두드림이, 나의 ‘원형’이 O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늘에서야, 나는 이 곡이 왜 그토록 누군가의 마음에 깊게 서려 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곡. 나보다 더 투명하고 동그란 것이, 각진 ‘네모’를 조용히 사포질 해냈다. 내가 앞으로 간다고 믿었던 모든 걸음은, 실은 내가 아는 ‘나’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를테면,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