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이 뛰노는 밤에는 루리에와 그레차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가 좋겠다.
어젯밤에는 레오니드 코간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을 들었고, 오늘 아침에는 (뭘 들었지? 로딩 중...)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을 반복 재생했다. 지금은 아르튀르 루리에의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연약한 전주곡」을 듣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생각해도 너어-무 신난다. 7월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그 시간은 내게 즐거움과 미소다.
장마에 온 세상이 습기에 몸부림치는 계절을 왜 기다리나 싶을 것이다. 별 이유 있겠나!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의 공연이 무려 네 개나 된다. 그것도 한 달을 쭉— 걸쳐서! 10일에 하나, 12일에 하나, 24일에 하나, 30일에 하나! 벌써 아쉬움이 느껴지신다면 믿으실까?
기다림의 시간은 찰나의 1시간, 혹은 20분 남짓한 곡 하나의 대충 5배쯤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자꾸만 멤도는 것을 자처하는 이유는, 그 기다림만큼 또 다른 길 하나가 내 이정표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년 10월의 하우스 콘서트를 떠올려보자. 그날 나는 연주가를 통해 생상의 바이올린 소나타 75를 초연받았다. 초연이란, 무용이나 연극 따위를 첫 번째로 공연함. 또는 그 공연 자체를 뜻한다. 나는 이 곡을 아마 별일 없는 한, 내 이름을 정말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시점까지 들을 예정이다.
3·4악장을 자주 듣다가, 가끔 2악장으로, 그러다 1악장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듣게 되겠지. (내가 좀 좋아하는 곡 하나를 오래 듣긴 한다.)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음악과 가까이 머물지 못했고, 근래에 그 속의 가치를 눈치채게 되었기 때문에 아는 건 많지 않다. 하지만 마음은 늘 같은 곡에 동동 뛴다. 이상하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 앞에서 음이 뛰어노는 게 보이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예민한 내 속을 이해받는 기분이 많이 든다. 입 밖으로는 꺼내놓기 민망하고, 별일도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 있을 땐 거의 자연재해 같은 사소한 ‘문제’들이 있지 않은가? 그 잡념이 자리할 틈을 주지 않는 게 이 장르다.
요새 밤산책을 자주 한다. 당신은 산책길 위에 어떤 문장을 떠올려놓는가? 아마 노래를 들으며 걷겠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 무리에 시선이 닿기도 하겠다. 다정한 연인, 가족들, 귀여운 강아지, 삼삼오오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 다양한 모임들 속을 지나 홀로 걸을 때면, 이따금은 외로웠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매 순간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호르몬 하나로도 좌지우지되는 게 인간인데,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내가 가진 체력이나 생각에 따라 장면의 해석이 달라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은 외로운 적이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 해결 불가능한 내적인 ‘고독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리에 뻔하게도 음색이 들어와 있으니, 우울해질 틈이 없다.
어차피 세상만사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내가 상상한 일은 생각보다 잘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기저에 죽—깔아놓은 다음, 귓가에 클래식을 얹어놓으니 오히려 좋은 러닝메이트가 생긴 기분이다. 내면 수련 코치일 수도 있겠다.
일단 클래식이라는 장르 자체가 반칙이다. 자연의 소리를 천재들이 붙잡아와 20–30분의 이야기로 재구성해놓았으니, 이 산책길의 나무, 길, 공기, 바람 그리고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지 아시는가?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은 결국 인생의 굴레 안에서 한번은 클래식과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 자연인이 아니던가? (법 용어 말고) 하관이 닮은 사람들끼리 연인이 되고, 반지를 나눠 끼듯 서로 닮은 존재들끼리 친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참 신기한 건, 이 장르를 좋아하면 이미 조금도 닿을 수 없는 과거와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오늘 나는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의 버전으로 들었다. 그 통통 튀는 박자감을 들을 때면, 이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안 난다.
너무 음질이 좋고, 선명하고, 당장 어디 독일이나 미국에서 공연을 할 것 같은 생생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1892년에 태어나, 1973년에 생을 마감한 연주가다. 내가 바이올린을 좋아해보자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전혀 존재도 몰랐을 미지의 외국인이다.
신기하다. 나의 부모도 태어나기 전부터 누군가는 살고 있었고, 연주가의 길을 택했고, 이 음반을 만들어냈다.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 돌고 도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 깊이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택하는 모든 길목은 결국 그 순간의 편향적인 취향, 환경, 그리고 ‘운’으로 결정된다.
뭔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해서, 너무 크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전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그건 편의점에서 과자 하나 사는 정도의 가치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더 툭툭— 가벼운 마음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내 존재의 의미는 내가 증명하면서 살아야 한다.
증명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그냥, 내 앞에 있는 거.
당장 내가 좋아하는 것에 충분히 웃어줄 것.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