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크누아 오케스트라 콘서트_리뷰
들어가며—음악을 담아낸 미소겠다.
참 예쁘다. 한 사람이 완전한 타인에게 예쁘다고 느끼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남이다. 아니, 정말 그런가? 우리는 같은 종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서로 알고 있다.
‘아름답다’는 무엇일까?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등이 균형과 조화를 이뤄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준다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이를 나의 24일에 대입해 보면, 단순히 외적인 미가 충실하다는 의미를 넘어, 내 시선 안에 있는 연주자들의 ‘소리’와 ‘해석’이 조화를 이루며 내 감각에 기쁨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어여삐 여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렇다면 ‘예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행동이나 동작이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정말이지, 얼마나 귀여웠던지! 어제 들은 베토벤 교향곡 5번 4악장의 끝, 오고 가던 미소와 휘날리던 활털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문장이, 클래식 음악 속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격된다. 다시 ‘예쁘다’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올망졸망한 연주가들이 멘델스존, 쿠세비츠키, 그리고 베토벤의 ‘운명’ 속에서 각자의 ‘오늘’을 향해 확신을 얻는 그 모습이, 그야말로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연주가 귀엽다는 소리는 전-혀 아니다)
이제, 잔뜩 들떠 있던 연주자들이 보여준 그 ‘화합’을 되새겨보자. 크누아 오케스트라는 내게 어떤 장면을 선물해 주었는가? 이날의 나는 내게 ‘쉼표’를 주고 싶어서 별도의 예습 없이 공연을 찾았다. 단지, 협연 악기가 더블베이스이고, 시작은 멘델스존이며, 마지막은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강숙홀—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 나만의 일탈
보통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간다고 하면 ‘예술의 전당’을 떠올리지, 그 옆에 위치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홀로 향하진 않는다. 나도 음악원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두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공연 자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 출입구에는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딱— 붙어 있어서, 헛; 들어가도 되는 건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꽃다발을 든 다른 관객이 당당하게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런 소심쟁이;)
공연 시작은 7시 30분인데 이미 문 앞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다시 한번 헉; 했지만, 다행히도 7시 전에 입장이 가능해져서 무사히 일찍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공연 보러 왔으면 당연히 무대 가까운 자리가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대부분의 관객들이 2층 객석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지인의 연주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거나 사진으로 남기려는 목적이라면 높은 층에서 보는 것이 낫긴 하겠다.
다만, 거의 대부분이 우르르— 2층으로 올라가 버린 덕분에, ‘무대는 가까울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선 다소 신기한 장면이었다. 일순간 나도 모르게 그 흐름에 휩쓸릴 뻔했지만, 결국 ‘소리’를 더 가까이서 담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1층 4열쯤에 자리를 잡았다. 호사스럽게도 그날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지만, 내양옆은 비워져 있어서 꽤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시작 시간이 가까워올 무렵, 내 치맛자락이 한순간 살짝 펄럭였다. 에어컨 바람이 소리 없이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틀어주다니~~ 좋았다. 공연장이 이렇게 시원할 수도 있구나 싶어, 팔랑거리는 옷을 바라보며 나 혼자 팔랑거렸다. (팔랑팔랑, 19년도 공연에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키키)
크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조율 아래, 청춘의 정조
그동안 다양한 연령대의 클래식 연주자를 봐왔지만, 대학교 구성원들로만 오케스트라는 그만의 매력이 상당하다. 일단 전문 선생님들의 오케스트라보다 뭔가 푸르른 기색 같은 게 있다. (청춘인가) 물론 이 장르에서 연령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모두가 아시리라. 기본을 갖추고 무대 위에 서는 연주가들은 나이가 많든-적든-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색감'과 '해석'의 영역을 충실히 다뤄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제의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그러하였다. (연주는 프로처럼 해놓고 마냥 떨려하는 모습이 제일 귀엽다)
공연이 시작되기로 한 시각이 다가오고, 객석엔 어둠이, 무대 위엔 환한 조명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빛이 정말 하얗다. 요즘 봤던 다른 공연들을 떠올려보면 대개는 주광색이나 따스한 색감의 조명이었는데, 여긴 유독 ‘순백’에 가까웠다. 하얀 조명이라니, 혹시 눈이 아프지 않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좋았다. 단원들이 무대를 빼곡히 채우고 나면, 그 빛을 반사하는 것들이 유난히 반짝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머릿결이나 어깨선, 옷자락, 손짓에 그려지는 흰 테두리를 본 적이 있는가? 활 끝의 스크류는 보석처럼 반짝였고, 밝은 조명을 받은 나무 악기는 자꾸만 시선을 붙잡았다. 그 위에 더해진 맑은 표정들. 물론 아직은 무대 경험이 적을 테니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지휘자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그 빛 아래에서 하나의 ‘그림’을 펼쳐내는 그들이었다.
1. 멘델스존 - 헤브리디스 서곡《핑갈의 동굴》—파동을 쥔 얇은 손 끝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여행 중 마주한 바닷속 동굴, ‘핑갈의 동굴’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작곡한 헤브리디스 서곡은, 파도와 바위, 동굴의 울림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잔잔하게 반복되며 점차 거세지는 파형으로 표현된다. 눈앞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오래 남는 잔상처럼 흐르고 퍼지는 음악이다. 그 어떤 설명보다 생생한 감각으로, 바다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한다.
작곡가가 자연물을 소재로 영감을 받아 쓴 곡들을 듣고 있으면, 단지 선율 하나가 뻗어나가는데도 우주의 기운이 일렁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자연 속에 완벽한 직선이란 게 존재할까? 매 순간이 진동하고 서로 얽혀드는 흐름 속에서 파동이 일고, 기운이 어우러진다. 결국, 그 특유의 종합적인 흐름을 어떻게 소리로 재현할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겠다.
그리고 공연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점점 더 강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 지휘자의 역할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클래식 공연장에서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지휘자의 손짓을 따라가 보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이다. 그날 연주가 빛을 발했는지의 여부는 그 손끝의 방향과 리듬 안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수많은 단원 앞에 서서, 흩날리는 꽃잎이 되고, 단단한 바위가 되며, 어느새 바람을 몰고 오는 역할까지— 그 모든 역할을 지휘자가 수행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휘자 김영훈의 멘델스존은 어땠을까? 지휘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를 온전히 따라간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는 이 멘델스존을 정말 ‘성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데 있어 감상의 핵심은 결국 ‘화합의 소리’가 아닌가. 악보에 어떤 다이내믹이 쓰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각적으로 이 부분은 강하게, 저 부분은 여리게 표현되어야 할 타이밍이 있다는 건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작곡가가 의도한 자연의 파동을 청중에게 간접적이지만 정확도 있게 전달해 주면 각 파트의 역할이 살아있는 ‘합’을 느낄 수 있다.
이날의 연주는 모든 소리가 지휘자의 검지 손끝에 정갈하게 얹혀 있는 듯했다. (믿고 있구나?) 넘치지도,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았다. 오히려 화려함보다는 절제 속의 밀도에 가까웠다. 멘델스존 특유의 낭만성과 아름다움에만 몰입하기보다는, 그 음악을 정직하게 손에 쥐고 기본에 집중하는 해석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처럼 기교가 지나치게 넘치거나 과하게 출렁이는 연주는 선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담백한 해석은 꽤 매력적이다. 지휘자는 손을 결코 가볍게 쓰지 않았다. 앞에 놓인 악보의 ‘원형’을 아껴가며, 그것을 최대한 온전히 담아내려는 태도가 기억이 난다.
2. 쿠세비츠키 - 더블베이스 협주곡 올림바단조 —안녕, 더블베이스?
무대 앞에 선 더블베이스는 평소보다 훨씬 낯설게 느껴진다. 지휘자로 잘 알려진 쿠세비츠키가 자신의 악기를 위해 직접 작곡한 더블베이스 협주곡 올림바단조는, 낮고 둔탁한 줄만 울릴 거라는 편견을 부드럽게 무너뜨린다. 선율은 깊은 음 속을 가로지르며, 고요히 노래하거나 불현듯 감정을 토해내듯 솟구친다. 땅 가까이에서 울리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오히려 기묘하게 떠 있는 듯한 울림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는 더블베이스랑 인사하느라 바빴다. 일단 크기부터가 눈에 띄게 압도적인데, 그 소리는 또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내 느낌엔 더블베이스는 풀피리의 숨결에 아쟁과 가야금의 결을 얹은 듯, 서양 현악기 중 가장 동양적인 기운을 품은 악기 같았다. 활로 긋는 소리라고 해도 마냥 쨍-한 울림만 내는 게 아니다. 첼로보다는 훨씬 밀착된 인상이고, 바이올린과는 또 멀다. 다만, 그 덩치만큼이나 소리의 품이 넓고, 깊다. 몸으로 휘감기는 음색이라고 하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 더블베이시스트 김영빈이 이 악기를 다루는 모습이었다. 기본적으로 한 손엔 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지판 위에서 줄을 짚는다. 대부분의 현악기 연주처럼 왼손이 지판 위를 자유롭게 오갔던 것 같은데 이 곡에서 그는 지판의 왼쪽 끝, 한 줄 위에서 주로 연주했다. (와, 신기했다) 위로 또, 아래로 손이 이동하는데 막 운지법이 낯설었다. (현 하나에서만 움직이니까) 손가락 간격이 거의 붙어 있는 상태에서, 마치 차곡차곡 걷듯이 내려가기도 하고, 꾹꾹 눌러 찍듯이 눌렀다. 현악기인데도,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던 중, 2악장의 후반쯤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손이 지판의 가장 끝까지 내려가더니, 다른 줄로 옮겨가며 바이올린처럼 맑은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귀가 공명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사람마다 가슴을 툭- 건드리는 음색은 따로 있지 않은가. 내 경우엔 바이올린이 휙- 서로 다른 굵기로 상향 곡선을 그리거나, 아래로 퉁-! 하고 피치카토 할 때 마음이 이끌리는 편이다. 선 하나가 방향을 틀며 아득하게 여운을 남길 때 그 안에 머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더블베이스 특유의 중음역 파동에는 약간 거리감이 있었다. 그윽하지만 다가서기엔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감촉. 그런데 그 순간—바이올린의 음색을 닮은, 그러나 더블베이스만이 만들 수 있는 넓고 얇은 기운이 정면에서 날아오니까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는 기분이었다. 아, 이런 악기였구나. 그렇게 몰입하고 나니 어느새 3악장이 끝나 있었다. 이쯤 되면 협주곡은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블베이스와 제대로 ‘인사’ 하기 위한...
3. 베토벤 - 교향곡 제5번 다단조《운명》—활털도 웃는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운명’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네 음으로 이루어진 도입부가 어떤 예고처럼, 혹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 곡은 단지 비극적인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통을 지나 마침내 빛으로 나아가는 구조 속에서, 청각을 잃어가던 작곡가의 내면과 결의가 들린다. 흔히 말하는 '극복'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음악적으로 설득력 있게 느껴진 적은 드물다.
이제, 그 유명한 ‘바바바밤’— 베토벤이다. 크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닌가? (교향곡이니까) 다만, 내가 따로 예습을 해간 건 아니라서 다른 팀들과 해석의 차이를 비교하진 못한다. 어차피 나는 비평가가 아니라, 호평가가 아니겠나.
베토벤의 그 서두를 들어보면 너무 유명한 부분이라서 괜히 장난스럽거나 가볍게 들릴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크누아의 ‘운명’은 그런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도록, 장중함으로 다가왔다. 이다음부터는 막 상상을 펼쳤다기보다는 열심히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오케스트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전체적인 화합이나 그림을 조망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서 관찰하는 재미도 크다. 확실히 합이 좋은 크루들은 악기 위에 얹는 손의 움직임이나 공기 흐름 하나로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해 버린다. 학교 마다도 각기 다른 결이 있는 것 같다, 이날 한예종 학생들이 들려준 베토벤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원초적이면서도 통제되고,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19살의 베토벤.
원초적이라는 말은,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담당 교수님에게 배우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 교육 시스템 안에 고분고분 얌전히 따라가는 모범생 같진 않다는 의미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엔 침잠해야 한다는 ‘암묵적이고 응히 따라야 하는 룰’이 있어서, 자기 본성을 눌러두고 있는 듯한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다 지휘자가 확 당겨낼 타이밍이 오면, 그만큼만 정확히 터뜨려준다. 그런 조절력 안에서 밀도 높은 화음이 보였다.
내가 1층 앞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마주 보이는 연주자들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주로 무대 중앙 쪽 연주자들의 표정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 오케스트라는 캐릭터 있는 사람들만 선발된 것일까? 어쩜 그렇게 한 명, 한 명 외면적으로나 연주 스타일이나 다들 개성을 갖고 있어서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유독 인상 깊었던 건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소리가 웃고 있었다. (실제로 몇몇은 웃고도 있다) 언제 웃음이 가득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악기별로 소리를 응축시켜 쏟아내야 하는 장면이나 흐름은 점점 상승하고, 텐션이 결말을 향해 고조되는 그 순간에— 첼로와 바이올린이 웃기 시작했다. (몰입의 순간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활털이 휘날리고, 표정은 살아나며, 진지하게 악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는 눈빛이 뜨겁다. 사람이 음악을 만드는 그 순간인데 음악도 사람을 되살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왜 저 무대에 서 있는지, 각자의 이유만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나는 객석에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게 느껴졌으니 음악 안에 몸을 담고 있는 그들 스스로는 얼마나 재미났을까? 내가 베토벤 안에서 그 기쁨을 느끼는 그 지점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난 솔직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그래도 좀 진중한 곡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얼마나 활력 넘치고, 얼마나 두텁고 생생한 소리들이 가득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시기, 지금 이 얼굴들만이 낼 수 있는 '청(靑)'의 소리였다. 결국, 이 미소를 보기 위해 내가 이곳까지 온 것 같다. 요 며칠 내려앉아 있던 기색이, 그 순간 모두 사라졌다.
끝내며 —이름 모를 기쁨과 나눈 '안녕'
음악은 곳곳에 있다고 했다. 멀지 않은 자리에도, 기쁨은 늘 존재한다. 이런, 학생 신분의 연주가들이 주체가 되는 공연을 보고 나오면 로비가 늘 떠들썩하다. 지인들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던가? 서로 덕담이 오가고, 칭찬이 흐르고, 기쁨의 말소리가 공기를 부풀린다. 나는 그곳에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알고, 또 유일하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존재 하나는 있었다. 크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소리’. 나는 그 소리와 마음을 나눴고, 그들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예뻤고, 낯선 마음은 달래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오늘은, 그걸로 되었다. 잘 봤어요!
[줄라이 페스티벌] 노래로 건너는 러시아의 마음 – 20세기 러시아 가곡의 밤
러시아는 늘 말보다 노래가 앞섰던 나라다. 광활한 대지와 혹독한 시대 속에서,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은 멜로디로 흘러나왔다. 이번 무대는 쇼스타코비치, 메트너, 그레차니노프, 스비리도프 등 20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의 가곡을 통해, 그들이 마주한 역사와 정서, 그리고 인간 내면을 들여다본다. 민속의 향취부터 신앙의 고백까지, 언어는 다르지만 감정은 낯설지 않다. 이 밤, 박성환(Baritone), 정태양(Piano)이 노래로 러시아를 건넌다.
1. 스페인 가곡, 작품번호 100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작곡가가 스페인의 민속 선율에 착안해 작곡한 여섯 곡의 연작 가곡이다. 이국적인 정취 속에서도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어, 낯선 민속 리듬 안에 러시아인의 정념과 아이러니가 교차한다. 민속적 외피를 빌려 작곡가는 내면의 갈등과 열망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2. 8개의 시, 작품번호 24 중 ‘황혼’ – 니콜라이 메트너
황혼의 빛처럼 서서히 스미는 곡이다. 하루의 끝자락, 빛과 어둠 사이의 경계선에서 인간의 감정은 가장 민감하게 흔들린다. 메트너는 말 대신 선율로 그 순간을 조용히 붙잡는다. 절제된 낭만, 고요한 침잠, 그리고 사라지는 순간의 명상.
3. 2개의 가곡, 작품번호 15 중 ‘죽음’ – 알렉산더 그레차니노프
죽음을 소재로 하지만, 이 곡은 슬픔보다 평온에 가깝다. 격렬함 없이 단정한 선율로, 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응시하는 자세가 담겨 있다. 죽음을 두려움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감각으로 수용하는, 차분하고 진지한 음악적 문장이다.
4. 떠내려가는 러시아 – 게오르기 스비리도프
러시아인의 정서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낸 연작가곡이다. 12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자연, 종교, 상실, 희망 등 러시아인의 삶을 둘러싼 모든 정념의 축을 따라 흘러간다. 작곡가는 시와 음악을 통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민족의 정체성과 정서를 웅숭깊게 그려낸다. 떠내려간다는 말은, 동시에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 음악은 그 가능성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