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9일
유영, 올해도 봄눈을 보았나요?
우리가 처음 이름과 이름으로 인사를 나눈 게 2022년의 어느 계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늦겨울과 초봄 사이 언저리였겠거니 짐작하지만, 명확한 기억은 없네요. 시간이 이렇게도 빠릅니다. 벌써 25년의 8월도 끝이 다와가니, 적어도 2년의 시간은 확실히 지나왔네요.
어느새 나와 당신은 동갑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막연히—이 나이가 되면 너무 어리지도, 젊지도 않은, 다만 삶의 굴레에 딱 지쳐 있을 나이쯤이겠거니 상상했던 것 같은데, 제가 그 자리에 와 있네요. 느낌이 어떠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쭉—올라갑니다.
내가 당신의 마지막 이름을 22년 11월에 접어 둔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꽤 바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는 나태했던 것 같은데, 큰 그림 안에서 보면 일단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했더군요. 놀랍게도, 나는 아직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끝내 글로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기억하세요? 당신을 만나기 아마 몇 개월 전, 저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엉엉—울었습니다. 온전한 수고를 들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내놓았다고 생각했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모질고도—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말들을 들었습니다. 그때 당장은 크게 상처를 받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울음소리를 감추는 법밖에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쩐지 잠시 슬퍼하다가 끝끝내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그때 읽어 두었던 '명상록'의 문장이 도움이 되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우주의 먼지보다 더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라.” 그래요. 그 말 하나에 길게도 웅크려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포기하지 않았던 건, 그만큼 내가 그때의 것을 귀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오기도 있었겠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포기해 버릴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들일 필요도 없었겠습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당신을 만났고 봄눈을 그려볼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백지에 세상을 그리는 일이 얼마나 머리 아프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고,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작은 방에서 오늘의 글을 나누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던 날들. 수업이 끝나고 햄버거 가게에 들러 혼자 냠냠—버거 하나에 코울슬로 하나를 먹고, 근처 도서관 이곳저곳을 헤매며 골머리를 싸맸던 시간들.
지금 생각해도 꽤—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늘 나만의 할 일을 갖는 것이 얼마나 벅차고 기쁜 일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부끄럽게도, 오늘의 저는 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놓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전만큼 심장이 콩—콩—거리지는 않습니다. 더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선생님과 마지막 포옹을 하며 “계속 이어 나가라, 재능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날 이후로 나는 ‘이제 뭘 하지?’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 물음 하나가 오늘의 장소를 그려냈고, 이 장소에서 나는 또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제 뭘 하지?’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생각이 허황하지 않습니까. 중국어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도, 긴 소설을 좋아했던 것도, 향수 연기처럼 흩날리는 어여쁨을 길게 담아 줄 것들이어서 그리 하지 않았습니까.
문장이 계속해서 바뀌어 가는 요즘입니다. 내가 바라보기보다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열망이, 지금은 “열심히 붙잡아 두겠다.”는 문장까지 도달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직조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엔 예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열하면 끝도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 어항 밖에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당신과 잠시 이별한 사이, 나는 예쁜 추억을 많이 쌓았습니다. 어여쁜 시선도 나누었습니다. 미소도 나눠 가졌습니다. 스스로에게 선물도 많이 했습니다.
제 마음 안에 누군가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아주 짧은 순간들이 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기도 하고, 말로 꺼내는 순간 내가 추억하는 만큼의 가치가 줄어들까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 꾹—꾹—말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유에 그 서너 번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늘 혼자이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이름을 적는 것도, 백지에 엉엉—울며 글자를 채워 넣는 것도. 누구 앞에 서든 사방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나니, 나는 이것을 관망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왔습니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기분에 따라, 그날의 체력에 따라, 한들—한들 마음이 흩날릴 때면 지독히도 고독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자체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혼자 바로 선다는 건, 외로움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것일 텐데, 여간 쉽지 않네요.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7월은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보답을 짧게—짧게 받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노랗고 하얀 조명 아래에서, 나만이 알 수 있는 형태로 기억 속에 추억되었습니다. 나의 기쁨을 당신이 온전히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내 마음 안에 빛자락이 쏟아집니다.
부디 당신이 내 손을 붙잡고 함께 웃어 주며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좋았겠다—기뻤겠다—얼마나 행복했을까.”라고요. 앞을 기대하고 뒤를 그리워하는 달뜬 마음이 가득한 요즘입니다. 다—내가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냥 하게 될 걸 아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디서 재미삼아 봤던 사주에서 “너는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을 장작 삼아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떤 것 같습니까? 나중에—길게 답해 주세요.
유영,
2025년의 8월은 무척이나 무덥습니다. 거긴 여전히 봄이겠죠? 지나온 22년의 당신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도 그곳엔 봄눈이 내리고 있나요?
그 눈이 다시 오면,
그때쯤 당신의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럼—안녕, 안녕.
2025년 8월 29일
유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