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정서영 피아노 독주회
구의 원형을 지나오니,
내게도 짧은 여유 시간이 생겼다.
써야만 하는 다음 글이 당분간 없다는 것 자체가 꽤 안심이 되면서도, 늘상 있던 자리에 무언가 비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한 건 아닌데, 당장 내뱉어야 할 감정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누구도 들여놓지 않은 빈방인 채로 며칠을 보냈다.
이전 글을 쓰고 나면 엘가고 타네예프고 절대 돌아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나는 역시나 1일의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선의 끝의 끝의 끝까지 함께하고 나니 더 가까워졌다. 이게 다 가장자리까지 머문 탓이겠지.
원형을 메워놓고 나서는 사촌동생의 졸업 연주회로 향했다. 이 날만큼은 아무 생각도 없이 편-하게 듣겠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객석에 앉아 있었는데, 웬걸. 그가 나를 가만둘 리가 없다.
“언니, 제발 어땠는지 알려줘.”
“(???)”
영아, 언니가 뭘 알겠냐며.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지나온 공연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래, 되돌아가 보자.
영아, 들려오는 대로만 말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J. Haydn - Sonata in A-flat Major, Hob. XVI:46
애기가 또랑또랑 걸어가네. 꽤 속도감이 있는 편이려나. 부드럽게 재간거리니까 듣기가 좋다. 부담감이 없네. 왼손이 땃땃거릴 때도, 서로 다른 춤을 출 때도 건반 위에서 충분히 노닐 줄 아는구나.
나에게 하이든은 꽤 규격적인 느낌이었는데, 네 안에 있으니까 병아리 색 아우터를 하나 껴입고 있는 것 같네. 엄청 잘 걸어주니까 음표 하나씩 내가 편하게 붙잡아둘 수 있어서 좋아. 왼편으로 내려앉을 때도 꽤 단정하구나. 세 개의 걸음이 두 번 반복되는 악장의 마무리가 무척 좋았어.
너는 피아노 앞에서 이렇게 차분한 사람이구나. 과장됨이 없네. 왼손의 나긋함이 마음에 들어. 오른편이 충분히 흔들려주니까 포인트가 되는구나. 너는 왼손도 오른손도 따뜻하구나. 가만히 머물러 있기 편하네.
왼쪽 귀로 들리는 얇고 높은 음의 이어짐이 기억에 오래 남네. 오른편이 생글거릴 때 반대편 선의 역할이 중요하구나. 오른손이 네 번의 종소리를 낼 때도 소리가 맑다. 듣는 사람을 앞지르기보다 제자리에 같이 있어주는 선택지도 꽤 괜찮구나.
기분 좋게 얇다랗고 높은 소리가 귓가의 양옆으로 동-동- 띄워져 있으니, 이만큼 편안하구나.
속도감을 조금 높였을 때는 어떨까? 앞선 악장과 동일한 선명도라서 좋네.
너, 흰색 아기 백조 같아.
A. Scriabin - Sonata No. 4 in F-sharp Major, Op. 30
스크랴빈은 첫 그림자를 이어다 놓는구나. 오른손 뒤에 있는 긴 잔향이 오래 바라보기 좋다. 큰 소리가 다음 반짝이를 감싸안아주는 부분이 참 신기하다. 거대하고 동그랗게 안아주네.
윤을 내미는 길이야? 수놓는 느낌은 아니고, 나열해주는 것 같아. 리듬감이 몰려 있는 구간은 어떨까. 부담스럽지 않게 짚어주는구나. 구간을 잘 벌려놔주네.
음이 몰려 있다가 높은 소리 하나가 혼자 떨어져 나오는 그 소리가 참 듣기 좋다. 스크랴빈은 뭐 하는 사람이래. 은근히 장난스럽지만 차분한 기색으로 로맨틱한 사람인가 봐. 너를 통해서라면 그렇게 보여지네. 때때로 꺄륵-거리는 오른편 이야기가 꽤 즐겁네.
Schumann - Kreisleriana, Op. 16
몰어 붙여 놓는구나? 반원을 반복적으로, 같이 그려나가는 것 같네. 소리가 계속 중앙으로 돌아오네? 신기하다. 일직선으로 가려다가도 꼭 되돌아와.
꼭 내게는 바흐만 같네. 그냥, 그 작곡가의 곡을 들었을 때 생겨나는 따뜻함이 떠올랐어. 보폭감이 마음에 들어. 천천히 피었다가 느리게 접는 꽃잎이야? 아래에서 놀기도 하는구나. 반복해서 돌아오는 구절들이 참 마음에 든다. 오늘의 슈만에선 이 음들을 기억하게 될까?
곡들을 들어보면 한 번씩 병정같이 노니는 구간이 있더라? 슈만 안에도 있구나. 이번엔 조금 더 기다랗게,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꼭 되돌아오더라. 그 변화된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 재밌어.
아래로 또 아래로, 지층 위에서 걷는구나. 가라앉아 있을 시점이구나. 따뜻하네. 꽤나 온화해. 담담한 편이야. 기다릴 줄도 알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3번을 닮아 있는데 조금 더 무게감을 낮추고 재미를 노니는구나. 오른편으로 세 번씩 향하는 장난은 뭐야? 가볍지 않게 간드러지는 유희가 보기 좋네.
앞선 그림자를 잘 들여다 놓아줘서 좋은 것 같아. 다정해. 계속 기다려주네. 짧은 것들이 반복될 때 첫 음들을 그다음 것보다 커다랗게 그려다 놓았구나.
거대할 줄도 알고, 담대할 줄도 아네.
슈만을 휘감아 버리게? (화면 전환 귀엽네)
마지막은 어떻게 할래? 무게감과 크기를 줄여나가는 선택지이려나. 꼬롱거리는 게 뭔가 귀여워. 물 안에서 숨 쉬는 것 같다. 이봐, 아기 백조 맞는 것 같아.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