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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수&카메라타 솔 <겹의 미학>_리뷰

by 유진

어렵다. 마음에 이미 둥글게 담긴 것을 한 줄의 긴 실타래로 다시 풀어내는 건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어제(현재 시점 20일 오후 11시 44분)의 기억을 몇 자의 글로 풀어보려는 건 내게도 꽤나 의미 있는 공연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손끝에서, 생각의 끝자락에서, 자꾸만 머뭇거리는 걸 보니 가볍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반드시 나열하고픈 단어들을 길잡이 삼아 어제의 조각들을 담아내려 애써 본다. (해야지. 잊으면 아쉬운 건 그저 나뿐이다. )


우연과 필연

사전에 따르면 우연은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고, 필연은 부사로 '틀림없이 꼭.'이라는 뜻을 가진다. 본 공연은 서로 다른 시간에서 나타난 우연과 필연이 얽혀서 내게 찾아왔다. '우연히' 내가 시선을 두는 것의 근본에는 '클래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2024년의 겨울에 깨달으며 내가 '취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확신했다. 또, 마음에 박힌 것을 무언가의 '형태'로 기록하고, 시선이 맞닿은 것은 길게 각인시키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남긴 몇 가지의 발자취 덕분에 나는 '우연히' (인과관계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지만) 하루에 바이올린 협주곡을 네 곡이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가야했다. 현재 나는 3월에 있을 현대음악 바이올린 공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바이올린이 내는, 한 사람이 내는 소리를 보다 선명하게, 그 결대로 듣고 싶었다.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서 더 깊은 차원에서 '소리'를 듣고 싶었다. 다만, 아직 나의 경험이나 청취 능력이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따라와 주지 못했다. 그저 현재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소리가 무엇이고, 어떤 감정선과 해석에서 아득함을 느끼는지를 미약하게나마 파악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나는 오늘의 공연이 중요하게만 느껴졌다. 내 귀가 더 깊이, 넓게 트이길 바라면서.


바흐, 취향

난 전공자가 아니지만, 좋아하기로 택한 것에는 충실하고 싶었다. 그 음악이 태어난 이유, 이 음악을 들으며 느껴야 하는 생각과 감정, 작곡가의 마음 정도는 알고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사실 이런 배경지식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멀티태스킹을 하려고 해도, 악기의 소리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탄생한 공간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그 순간, '함께' 혹은 '홀로' 연주가 그어지는 향연이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순간, 어찌 잡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래서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


그렇게 시작된 첫 곡이었다. 사실 나는 바흐가 아직 낯선 작곡가이다. 자유롭고 난해하며, 기교적이고 즉흥성이 강한 레퍼토리만 반복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바흐의 파르티타보다 이자이의 무반주 소나타가 더 익숙하다. 어쩌겠는가? 참고로 이건 순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다.) 바흐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 딱딱한 형식에 맞춰 함께 달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그동안 내가 듣던 음악과는 상반되어 심리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제 공연 전에,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대에 '협주곡의 기본'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전까지 웅웅거리며 들리기만 했던 선율이 '이런 곡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존재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연주자들이 정석적으로 딱딱 합을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김응수 바이올리니스트의 리드에 맞춰 각자의 소리를 만들며 조화롭게 연주했기 때문에 음원으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선명하고 다채롭게 들렸다.


두 번째 협주곡에서 한 번씩 깊게, 또 아주 짧은 여유와 늘임을 가지며 찍고 올라오는 부분이 좋았다. 아마도 2악장의 일부인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다시 들어보며 확인해 봐야겠다. 나와 희한할 만큼 모든 취향(의식주)이 정반대인 내 친구는 바흐 협주곡이 괜찮았다고 했다. (나는 세 곡 중에서 바흐 협주곡이 3위였는데.) 역시 사이언스다.


(추가) 앵콜

앵콜 곡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였다는 사실을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어쩐지 익숙한데 정확히 모르겠고, 처음 듣는 것 같은데 흐름이 낯익은 느낌이었다. (나는 정말 이자이밖에 모른다... 진심으로.)


베토벤, 빛

솔직히 베토벤은 아직까지는 교과서나 위인전에 나오는 이름 같을 때가 많다. 그러다 협주곡을 예습하면서 (실내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그도 '사람'이었구나. 조금, 매우 많이 '똑똑'하고 창의력이 '위대'한 사람.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만들어내는 '서사'와 '철학'. 2악장은 '명상과 사색의 순간'이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귀에 곡을 담았다. 오케스트라의 합은 물론이고, 협연자께서도 워낙 행할 것을 행한다는 느낌으로 능숙하게 곡 전반을 이끌어 나갔다. 협주곡을 소개받는 기분이었다. 그 흐름에서 나는 어떻게 들을지를 자연히 선택했던 것 같다. 보기보단 그냥 '들어보기로'. '듣기'를 택했다는 것은 시선이 조금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뜻했다.

내가 앉은 좌석은 2층 A블록으로 왼쪽 사이드였는데, 콘서트홀이라 1층 좌석과의 거리가 더욱 넓게 느껴지고, 위로는 층고 높은 천장과 벽들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시야였다. 아래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눈에 들어오며, 시선을 들면 희기도 노랗기도 한 그 조명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 노을이 드리워질 무렵에 호수면에 일렁이는, 반짝이는 포말 조각을 닮은 빛들이 길게 연결된 마이크 선을 비춘다. 카라멜 색의 구비구비 굴곡 있는 벽들. 비어 있던 옆 객석 너머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선선하고 고요한 바람. 그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현악의 소리. 놀랍도록 조용했던 사람들과 2악장. 유려하게 소리를 만들어내는 솔리스트.


이 모든 게 합쳐지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지금 구름 속에 있나..? 세탁기 광고에 나오는 그 목화솜 같은 것들이 내 주위로, 내 손마디 사이사이, 볼에 맞닿아 있는 느낌이 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행복감이 있었다. 무릎 위에 얹어놨던 손을 살짝 펼쳐 들어 다가오는 바람을 만져보았다. 좌석에 충분히 몸을 맡긴 채 고개를 들고 멍.. 하니 '빛'을 보며 들려오는 2악장은 내가 아침마다 보는 그 '빛의 공간'을 떠오르게 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잠깐의 오르막길을 올라와 내려다보면 넓은 차선의 도로가 펼쳐지는데, 오전 8시 30분의 노란색 햇살이 도로 위와 건물을 넓게 드리워져 있다. 연노란색의 빛이다. 푸른색 그늘 아래에 있던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안으로 들어서면 기분과 마음이 참 따뜻하다.


넷플릭스에 헤드스페이스라는 인터랙티브 명상 프로그램이 있다. 정말 하루에 수업을 몇 개씩 듣고,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중간마다 반드시 이 프로그램으로 머리를 비우곤 했었다. 명상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눈을 감고 햇빛이 나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비춘다고 상상하는 단계가 있다. 그 길을 거닐 때면 내가 추가적인 상상할 필요 없이 햇살이 나를 비춰준다. 거기다 상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 아침 특유의 개운함과 푸른빛의 선선함이 좋다. (중간쯤 걸을 때 풀랑크 소나타 2악장 중반이 귀에 들려오면 나는 정말 더없이 행복하다.)


베토벤의 2악장을 들으며 나는 또 그날의 아침을 회상한다. 너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 촉감을 느끼며, 눈앞에 가득한 그 하얀 빛들이 시선과 귓가 한구석에 머물러 있는 기분 속에서.


2층 A블록 3열 4번

사실 그날의 공연에서 좌석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정말 행복한 자리였다. 원래 나는 대체로 자리 운이 없는 편이다. 사실 클래식 공연만큼 아주 사소한 소음이나 움직임이 관람에 지장을 주는 공연이 없는 것 같다. 실생활이었다면 묻혔을 잔기침, 뒤척임, 귓속말, 패딩 소리 등이 발원지 주변으로 광범위하게 퍼진다. (정말 여기까지 들린다고? 싶은 방향까지 들린다.) 이런 소리에 익숙해진 건 반복된 노출 훈련 덕분이다.


첫 번째 훈련지는 2025 윤이상 콩쿠르 입상자 콘서트 때였다. 보통 내 앞자리는 희한할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앉았는데, 입이 좀 심심했는지 사탕을 많이 까먹었다.. (나도 모른 척해 주고 싶었는데 봉지 까는 소리가 너무 ASMR이었다.) 옆에서는 이클립스를 드시는 것 같았다.. (철제통 뚜껑 여는 소리가 딱!) 이 날은 변수들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같이 간 엄마랑 서로 불편감을 (속으로만) 호소하느라 바빴다.


두 번째 훈련지는 인천시향 2025 신년음악회였다. 1층 중앙의 꽤나 좋은 위치였는데, 내 앞좌석에 꼬마 남자아이들이 (체격이 조금 좋은) 쭉 앉았다. 아이들이 듣기에는 조금은 길고 어려운 (이해한다) 곡들이었기 때문에 많이 뒤척이고 답답해했다. 사실 이때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갔고, 윤이상 때 키워둔 담력이 있어서 괜찮았다.


애들이랑 같이 듣는 거지, 뭐... 하는 마인드로 들으면 오히려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포인트가 즐거운 요소가 된다. 내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재미도 있고. '눈'을 감고 들어야만 들리는 소리들도 만날 수 있다. 내 앞에 앉은 남자아이는 유달리 키가 커서 솔리스트를 딱! 가려서 아예 보이지 않아 약간 걱정을 했는데, 양옆 친구들에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봐준 덕에 솔리스트를 까꿍놀이하듯 구경할 수 있어서 나름 재미가 있었다.


인터미션 때 아이들이 주변 어른들께 조금 훈계를 받아서 안타까운 맘이 들었다. (물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님 공연이었으면 속상했겠지만...) 공연이 다 끝나고 순서를 지켜 나가면서 앞자리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선뜻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그 얼굴이 생각난다. 귀여운 꼬맹이들. 나중에 너도 혹시 나처럼 클래식을 들으러 오는 날이 있을까? 궁금하다. (나도 그렇게 재밌다고는 생각 안 했어! 예전에는.)


브람스, 사람과 미소

4곡 중에 가장 익숙했다. 윤이상 때 들어보기도 했고, 연주가님의 콩쿠르 결선 무대로 보기도 했으며, 3악장이 유달리 신명하기도 했다. (부엌에서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놨다가 엄마한테 정신 사납다고 한 소리 들었다.)


(로딩중) ....무엇을 기억해 볼까 고민하고 있다. (현재 시점 21일)


일단 곡이 시작되기 전에 친구에게 내가 공부했던 이 곡의 키워드를 전달했다. 바흐가 기본 삼김(소가 없는), 베토벤이 융합의 참치마요라면... 브람스는 마라맛이다. 경쟁이다! (인터넷에서) 그래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경쟁적으로 치고 들어오고 소리를 내는지 지켜보고자 했다.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만 보면 상당히 치열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진 않았고 서로의 탁월한 소리가 오가며 곡을 흐르게 만들었다.


솔리스트의 위치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솔리스트는 지휘자의 바로 옆에 서 있는데, 김응수 바이올리니스트는 지휘자의 시선 안에,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중심 부분, 보다 안쪽에 위치해서 연주를 진행했다. 솔로 부분이 시작되기 전엔 각 악기 파트별로 살짝씩 시선을 던지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이 음악이 잘 흐르고 있다는 걸 확인해 주는 느낌이 들어 안정감이 생기고 좋았다. 또, 앞서 나가기보다는 함께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그냥 '경쟁'적으로 느끼지 않았나 보다. (지금 깨달았다.)


브람스 협주곡 2악장에는 오보에의 길고 아름다운 선율이 존재한다. 사실 공연장에서 음악을 향유하는 주체는 관객뿐만이 아니다. 그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는 사람들도, 누군가의 음악을 직접 행하며 그 순간을 탐미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문득 잊기 쉽지만, 오케스트라 단원 몇몇 분의 미소 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봐 온 오케스트라를 떠올려 보면, 미묘하게 직장인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아무래도 집중한 표정이시겠지만, 오전 6시 30분이나 오후 4시쯤 생기는 고단함이 느껴져 아주 가끔은 동질감이 들 때가 있다. 이 공연은 2층에서 바라본 무대였기 때문에 그런 세밀한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작고 기쁜 액션들은 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오보에의 선율이 홀을 넓게 넓게 메우는 순간, 무대에 있던 단원 중 한 분(현악 파트)이 눈을 감고 그 음을 마음 깊이, 기쁘게 음미하는 표정이 보였다. 나만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아니구나. 그 순수한 음악을 사랑하는 눈빛과 표정에 나도 덩달아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분(현악 파트)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솔리스트에 따라 고갯짓하며 활을 움직이는데, 그 모든 일련의 행동에서 '존경, 행복, 이 순간의 기쁨'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두 사람 덕에 그날의 브람스는 참 기쁜 곡으로 기억되었다.

곡이 좋았다를 넘어, 그 미소가 이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었다.


사람

결국은 사람이다. 좋은 곡을 듣다보면, 곡 이면의 것들이 보인다. 곡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 그 곡을 만든 작곡가. 그 곡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 답답해하는 사람. 함께해주는 사람. 애쓴 사람. 다양한 곳에 숨겨진 사람들이 그 넓기도 작기도 한 공간에서 모두 함께 그려 진다. 그게 내가 이 공간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 인 것 같다.


추가. 겹의 층위

층위가 느껴진다. 그것도 차곡차곡. 어제와 오늘이 같을 수 없다는 느낌이 이런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멘델스존 스트링 콰르텟 6번 1악장 6분 30초 부분을 듣는데, 음의 그 존재 위치가 보다 선명하게 찔러온다. 사실 찌른다기보단 무겁다. 박혀온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깊게 깊숙이 패부에 4개의 층위에서 서로 다른 음과 빠르기로 달려드는 느낌에 아침부터 이마를 짚었다. 학습의 효과가 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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