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나의 순례길 일정은 짧았다. 800km에 이르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중 250km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 하이킹보다 하이힐에 가까운 나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여행 경비의 3분의 1을 준비물 사는 데 썼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애정하는 친구 덕분에 그나마 아낀 게 그거다. 등산장비는 반짝반짝 윤이 나서 외려 촌스러웠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첫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둘째날은 쓰러질 뻔했고, 셋째날엔 쉬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잘 다녔다.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느렸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경치는 아름다웠고 음식은 끝내줬다. 사람들은 꽤 친절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매일 7-8시간을 걷는, 평소의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을 스스로에게 하사한 시간들. 엄청난 변화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금의 기대도 없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향후 몇 년 간의 방향쯤은 잡히리라. 내심 바랐다. 순례길을 가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까미노의 하루는 단순했다. 일찍 일어나 아침 먹고 걷기 시작. 2-3시께 숙소에 도착하면 바로 씻었다. 덜덜덜 돌아가는 세탁기를 한참 멍때리고 바라보다 빨래 널고 낮잠을 잤다. 저녁 먹고 동네를 슬슬 돌아다니다 짐을 정리하면 하루가 끝났다. 그렇게 걷는 내내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다음 마을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커피 마시고 싶어 죽겠네' ''점심은 뭐 먹지' '이 코스는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거야. 내 호신용 스프레이 어디 갔더라' '어디서 자지?' '오늘은 꼭 빨래해야지' '샴푸 사야되는데 슈퍼 문 닫았음 어쩌지'-
나는 코 앞에 닥친 일만 골똘히 고민하고 코 앞에 닥친 일만 해결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코 앞에 있는 일밖에 없는 사람처럼. 이게 뭐야, 이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 일정이 절반을 넘긴 어느 날, 작정하고 내 인생에 대한 생각에(이 표현 유치한가) 집중해 봤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의식은 다음 마을에 과연 화장실이 있을 것인가로 흐르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음날엔 부러 천천히 걸으며 또 해봤다. 같은 결과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산티아고에 입성했다.
코 앞에 닥친 일에 급급하고 눈 앞의 것만 보는 일이 어리석음의 표상이라고 여겼다. 어쩜 그렇게 멀리 못 봐 인간아. 나는 내게 언제나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땀에 쩔어 목적지에 도착한 그 날, 산티아고 대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내가 오랜만에 좋았다.
실은 그것이 나를 산티아고로 이끌어 온 거였다. 코 앞에 닥친 배고픔과 빨래와 잠들 곳을 걱정하며, 매일매일 당장 내 눈 앞에 놓인 그 일들에 정성들인 힘. 산티아고를 잊지 않되, 사실은 잊고 걸어온 덕으로.
속시원히 이 길이다, 싶었던 적은 어차피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다음 마을에선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오늘은 빨래를 할 수 있을까, 내일은 따뜻한 동행을 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잊지 않되 잊고서 그저 코 앞에 닥친 일들만을 꾸역꾸역 해결하며 걸어간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