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소중한 소란
언젠가 나는 이 소란을 더없이 그리워하겠지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한 번 해봤으니 제법 능숙하게 아기를 돌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놀랄 정도로 그렇지 않다. 남들은 '몸이 기억한다'던데 그런 몸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지금 나의 육아는 '아, 맞다 그랬었지'를 무한반복하는 시간에 갇혀 있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둘째라서, 둘째이기에 마음 한구석에 찾아든 여유로움 비슷한 것은 있다. 신생아를 벗어나 꽤 영근 아가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입가에 번지는 웃음이다. 그저 귀엽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실실 나온다. 첫째를 막 낳아 키울 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비장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 따위는 죽을 수도 있어!'
그랬던 내가 아이를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니. 과연 경력직이다.
그렇다고 나의 하루가 여유롭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매일 아침 폭풍이 휘몰아친다. 뭐든지 혼자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첫째가 겉옷의 단추를 다 채울 때까지 오은영 선생님의 미소로 기다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온 집안을 굴러다니며... 굴러다니며... 여기까지 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잠시 고요해지지만 젖먹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돌아서면 먹이고, 돌아서면 기저귀 갈고, 돌아서면 또 먹이는 일의 연속.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 했는데 해는 뉘엿뉘엿,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온다.
또다시 숨 쉴 틈 없는 소란이 찾아온다. '렛 잇 고'를 부르며 팽이처럼 도는 우리집 엘사를 어르고 달래 씻기고, 머리를 말리지 않는다고 뛰어다니는 모글리가 된 엘사를 잡아 옷을 입히고, 야채와 고기를 먹지 않는 아이의 저녁을 고민하다 결국 짜장 소스를 부어주는 동안 저기 방치되어 있던 갓 낳은 아이 한 명은 우렁차게 울어댄다. 혼이 나갈 지경이다. 우리 부부는 할인할 때 잔뜩 사둔 냉동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운 지 한참 됐다.
두 아이가 모두 잠든 밤. 밀려있던 잠시의 고요가 찾아든다. 너덜너덜해진 채 무알콜 맥주를 탁, 따는 순간, 숨이 탁, 트인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고요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소란이다. 언젠가 나는 이 소란을 더없이 그리워하겠지. 너무나 그리워 눈물도 나겠지.
첫째의 말이 터지기 시작한 올봄의 어느 날을 떠올린다. 매운 치킨을 달라는 아이에게 "다음에 줄게"라고 하자, 정확한 시간 개념이 없던 아이가 말했다. "지금이 '다음에'야. 벌써 '다음에'가 됐으니까 그거 줘." 귀엽고 웃겨서 마구 웃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다음에'는 없어. 항상 지금이 '다음에'어야 하지.
그러니 너덜너덜한 지금을 차마 즐기지는 못해도 넌더리를 내지는 말자. 비장함보다는 작은 여유로움을 쥐고 가자. 언젠가 이 모든 소란이 사무치게 그리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