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은 개뿔

흔들리고 다투고 고민하다 마침내

by 임주리

이 좁은 이코노미 좌석을 10시간 넘게 어떻게 견딜까 하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보려고 재생한 영화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였다.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이혼 후 세계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와 인도를 거쳐 발리에서 드디어 인생의 균형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불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다. 이러면 안 돼, 어떻게 찾은 균형인데. 리즈는 남자와 헤어지기로 다짐한다. 겨우 찾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결국 깨닫는다. 흔들리는 것, 그것이 때로는 인생에서 가장 균형잡힌 상태라는 걸. 그리고 그의 품으로 달려간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책 <정희진처럼 읽기>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게 평화가 아니라고. 다투고 싸우더라도 좀 괜찮아지려고 계속 애를 쓰는 상태가 어쩌면 평화라는 거다. 정확한 문구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뒷문장은 나의 해석일지라도 앞문장은 맞을 거다.

영화를 보다 멍하니 기내식을 먹다, 정희진 선생의 글을 곱씹는 사이, 생각은 십 년 전 일기로 흘러갔다.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유럽 여행을 떠났었다. 예정보다 몇 개월을 더 머물렀는데, 드디어 집에 돌아온 날 싸이월드에 쓴 글이 이랬다.
-다른 건 모르겠고, 마음의 평온함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


그리고 십 년.


하이고... 설명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평온은 개뿔이었다. 나의 날들은 대개 평온하지 않았다.

극복하기 힘든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인간이 모자라서 그랬다. 사랑에 빠지면 미친듯 호들갑, 연애가 끝나면 눈물 질질 흘리며 토악질. 일이 힘들면 힘들어서 또 질질, 일이 없으면 없는대로 불안하고 초조함. 더러 평온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잠시뿐. 떠나가는 평온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나의 다급함과 부족함을 탓했다. '으이그 모자란 년. 진정해. 제발 진정하란 말이야.' 그럴수록 심장은 덜컹거리고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랬다 정말.

인간이 간사한 건지 진화하는 건지, 요즘 나는 흔들림없는 평온함에 갖는 미련을 조금은 버렸다. 잔잔한 평화는 때로 억압의 결과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영화 <이끼>에서처럼 폭력으로 강요된 조용함, 연출된 평온 말이다. 각자의 마음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스스로가 스스로의 감정에 폭력을 휘둘러 겉으로는 평온한데 속으로는 마그마가 흐르고 있다면. 그게 더 불행한 것 같다.

찾아오는 감정 모두와 악수하고 싶지는 않다. 전문용어로 일희일비. 그러면 나아가질 못하니까. 될 일도 안 되니까. 그렇지만 찾아온 기쁨에 억지로 가부좌를 틀거나, 어느날 밤 들이닥친 우울에 파티타임 레디고를 외치는 일은 말아야겠다.
흔들리고 다투고 고민하다 마침내 조금은 나아가는 것. 평온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그것과 가까울지 모르겠다.


우아하고 기품있게 평온한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너무 나를 미워하진 말자. 눈물 콧물 질질 흘려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너무 쪽팔려 하지 말자. 대신 눈물을 닦을 땐, 화장실 휴지 말고 크리넥스를 써야겠다.

두 번째 기내식을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