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넘기 열아홉 번째 주제: 창밖으로 보이는 것
보낸 계절은 돌아오고 떠나온 곳에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이번 주제는 <창밖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노란 잎이 영글던 지난해 가을부터 이어온 글쓰기 모임의 열아홉 번째 주제다. 열아홉 편의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창은 변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도 변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창이 없어도 창을 낸다. 창을 만든다. 창을 원한다.
어떤 글은 외침 같다. 나에게도 창이 있으니 그 너머 풍경이 돼주오, 속죄하는 외침. 열아홉 개의 창을 내며 기꺼이 서로의 풍경이 되어준 사람들을 생각한다. 우린 언제까지 서로의 풍경이 될 수 있을까.
이사 후에 작은 서재를 갖게 되었다. 작년에 살던 고시원 방의 크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창의 크기는 열 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일 년 전 창밖으로는 인근 대학의 남자 기숙사가 보였다. 손바닥만 한 창마저 가리기 급급했다. 오늘 창밖으로는 가을 하늘이 보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다. 방과 창을 보며 오묘한 마음이 든다. 어떤 창도 영영 내 것일 수 없다는 오묘함. 무수한 창을 만나게 될 거라는 막연함 속 부푸는 기대.
초록 이파리 끝이 빨갛게 영그는, 다시 가을이다. 고궁을 걸어야 하는 계절이다. 친구 서연과 덕수궁을 찾았다. 정문인 대한문으로 들어가 중화전을 지난다. 아주 오래된 궁궐에도 창이 나있다. 아주 크게. 어쩌면 창은 특권인가. 그 창으로는 나무, 하늘, 풀이 비친다. 다시 걷다가 서양식 건물 앞에 서서 기둥의 문양을 살핀다.
“정관헌, <고요한 것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 이래”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서연은 건물 외벽에 적힌 한자를 유심히 바라보다 말한다.
“고유한 것을 바라본다고? 멋지네”
나는 고요와 고유 사이를 헷갈린 채로 두며 정관헌을 바라본다.
당시 정관헌의 용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진을 보관하거나 일상생활을 누리던 곳 정도로 추측된다. 그들은 무엇을 고요히 바라봤을까. 고유한 것을 바라보았을까. 고유한 삶을 바랐을까. 바라보는 것을 바라게 되는 것이 삶일지니, 창은 참으로도 중하구나.
단단한 모래 밟는 소리를 따라 걷다가 궁궐 안,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예술원 소속 작가들의 근현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얹은 그림 앞에 섰다. 낮은 명도의 산과 달이 액자식 구성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제목은 <창밖 풍경> 당시 작가의 시선 끝에 맺힌 장면이었을까. 이처럼 창밖 풍경을 말하고 있는 그림도 있지만, 어떤 작품은 그 자체로 창이 된다. 그 앞에 서면 작가가 고요히 바라본 것과 고유하게 바라는 것을 보게 된다.
열아홉 번째 창을 낸다. 궁을 거닐며 보았던 창 너머의 나무, 하늘, 풀이 이곳에도 비치길 바라며. 서로의 나무이자 풀이자 하늘인 우리를 기다리며.
날마다 창틀에 쌓인 먼지를 쓸고, 잘 닦아두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
기꺼이 그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