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받으며 걸어

재주넘기 스물세 번째 주제: 걸으면서 생각한 것

by 오말초

추위에 자꾸만 움츠러드는 몸을 펴고 걷고 싶다는 마음은 저녁 여섯 시 무렵 퇴근길에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은 내 많은 다짐을 훔쳐 간다. 오늘 저녁은 건강한 요리를 만들어 먹겠다는 다짐, 반신욕으로 굳은 몸을 풀겠다는 다짐, 고관절 교정 스트레칭을 하고 자겠다는 다짐, 성경을 읽겠다는 다짐 등등등 무수한 다짐이 3호선 어딘가에 버려져 멀뚱하게 있을 것이다. 진짜 고단수들은 다짐 같은 것은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딘가에 적는다면 언젠가 하지 않을까, 하며 낙관을 포기하지 않는 초보다.

원래는 기똥차게 걸으려 했는데, 이것을 핑계로 좋아하는 동네와 반가운 영화관을 벗 삼아 하루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글쓰기 모임 날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걸으면서 생각한 것을 적기 위해서는 걸어야 하고 걷기 위해서는 어디를, 어떻게 걸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은 ‘걷기 전에 생각한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나에게 걷기의 기쁨을 알려준 건 우리 집 반려견 모찌다. 모찌와 함께 살기 전에는 시간을 정해두고 걸을 일이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일주일은 거뜬히 방구석에서만 지낼 수 있도록 창조된 인간이기에 더욱이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 집에 눌러앉은 하얗고 말랑하고 뽀송한 생명체는 하루에 한 시간은 족히 바깥바람을 킁킁대야 살 수 있도록 창조됐다.

이런 내가 그런 개를 위해 매일 아침 똥 봉투와 리드 줄을 챙겨 집을 나서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여름에는 모찌의 꼬불꼬불한 털에 진드기가 붙지 않도록 벌레 퇴치 스프레이를 구석구석 잘 뿌려주는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똥꼬발랄 강아지인 모찌와의 산책은 결코 여유롭거나 우아하지 않다. 중간중간 궁금한 냄새를 맡기 위해 자주 멈추고,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배변을 하며 -뒤처리는 나의 몫- 친구를 만났을 경우에는 꼭 아는 척을 해야 한다. 가끔은 우리의 산책 코스가 아닌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기도 한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한가로이 살피는 산책자가 되고 싶었건만. 나와 다르게 창조된 애는 내 속도 모르고 킁킁, 헤헤, 헤헷, 헷헷.

그럼에도 얘랑 걷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걷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기분이 나아진다. 걷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옳지 않은 문장인 걸까? 사실 걷기 시작하는 동시에 많은 것이 시작된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강원도의 청량한 바람을 가로지르고 해를 맞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본다. 바깥을 본다. 아주 잠시라도 고루한 나로부터 환기하는 시간이다.

대학 생활에 정신없이 치이고 있을 즈음, 아빠가 보낸 카톡이 생각난다. ‘햇빛 받으며 걸어’ 딸의 비타민C 생성을 위해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일 텐데 내게 그 말이 너무 달았다. 가끔씩 햇빛이 온몸으로 들이닥치면 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햇빛 받으며 걸어.

모찌와 떨어져 지내는 요즘,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은은한 방구석에서 책과 책 사이로만 걷는다. 이 또한 나로부터 환기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가끔씩 온몸으로 햇빛을 받고 싶다. 그리고 모찌처럼, 아빠처럼 누군가를 햇빛으로 데려가고도 싶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