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사랑지상주의가 통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결국은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 이긴다.'
나는 이런 말들에 반쯤 동의하면서도, 반쯤은 언제나 의심에 발을 걸쳐두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언제, 왜
사랑한다는 말인가?
사랑에는 육하원칙을 따지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감정의 영역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적 층위에서의 사랑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사랑은 많은 인간이 가진 세속화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러한 사랑이 사랑의 본연의 모습인 것처럼 오해하지만, 그것은 로맨스물이 만들어낸 환상에 더 가까울 때가 많다. 성애적 사랑을 앞장서서 즐기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웃기지만, 나는 언제나 낭만적 사랑이 사랑의 가치를 많이 망쳐놓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랑을 때로는 상품처럼 느낀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을 소비자가 욕망하듯, 나는 그 사랑을 욕망한다. 사랑을 상품에 비유하다니, 너무 폄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이 시대에 인간을 비롯해 상품이 아닌 것은 없다. 더군다나 사랑이 모든 문제의 만능 해결책처럼 포장되는 현실은 이미 과잉이다. 입으로만 노상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작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끌어안는 행동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은 종종 힘을 잃는다. 당위도, 구체성도 없어 공허하게만 들린달까.
그렇기에 나는 사회에 만연하는 '혐오'에 대한 대척점으로 사랑을 논하려면, 그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무엇을 혐오하고 있고, 그 대척점에서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명확히 짚어낼 때 비로소 ‘사랑이 이긴다’는 말은 유효해진다.
자기 앞의 생
저자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01.24.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로자 아줌마는 창부이자, 육중한 몸과 흉측한 외양을 가진 여인이다.
그녀의 곁에서 살아가는 입양아 모모는 고아로, 로자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끔찍하게 여긴다.
그녀의 외양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우악스러운 행동을 비난조로 서술하면서도 모모는 늘 그녀의 곁으로 돌아간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나딘의 집에 머무를 수도, 다정한 롤라 아줌마와 함께할 수도 있었지만 모모는 언제나 로자를 걱정한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p. 256
이 책에서의 사랑은 단순히 “미워해도 사랑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실 끔찍히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품격 있어 보이는 위치는 늘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여기며, 거리에 똥을 싸는 모모이기에. 그러나 이 마음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 밑바닥의 삶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안된다. 그것은 상대의 모습에서 거울처럼 나를 비추어 보는 동일시이며, 상대의 마음을 내 것처럼 여기는 크나큰 사랑이다.
모모에게 사랑은 상대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지하실의 쾨쾨한 어둠 속에서도 촛불 없이 곁을 지키는 마음이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멸시와 무능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차라리'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흔히 소비되는 로맨틱한 사랑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차갑고 고단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더 깊이 뛰어드는 삶의 방식이다.
이들의 사랑을 보며 나는 흔하디 흔해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유태인 학대의 트라우마에 빠져 발작을 일으키고, 치매에 걸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로자를 감싸안아줄 유일한 대안은 현실에서의 냉담한 시선이 아니라 대가 없이 길러낸 존재인 모모가 주는 사랑뿐이다.이때 사랑은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뛰어드는, 차가운 세상에 동참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 취하는 하나의 '삶'이다.
모모는 끝내 로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권유를 거부하고, 지하실에 함께 남는다. 그리고 로자의 시체 곁을 3주간 지킨다. 로자를 사랑하는 것이 삶이 되어버린 모모는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 사랑해야 한다.
p. 311
혐오에 대적하는 사랑
앞서 나는 사랑이 혐오에 대적하는 대안이 되려면 우리가 무엇을 혐오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책에서는 그런 사회적 문제들을, 우리가 외면하고 혐오해왔던 사람들-창부, 고아, 난민, 병자, 트랜스젠더-을 주요 등장인물로 설정하며 정확히 짚어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성매매라는 현실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로자의 삶을 보듬어주고 싶게 된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모르고,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칸예를 소비하던 사람들도 잠깐 멈춰서서 그들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고 과감히 예측한다.
낯설고 불편한 목소리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아한 풍경을 꾸준히, 상세히 묘사하며 결국 독자로 하여금 존중을 배우게 만든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돌아볼 때 사랑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삶 속에서 일어난 명확한 사건이 된다.
이미 아끼고 있는 것들을 조금 더 감싸는 행위보다는,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사랑의 본질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손쉽게 말하는 사랑과는 달리 너무도 어렵고, 불편하고, 그래서 더 값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기 앞의 생>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쓰였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덧붙이며. 작품을 둘러싼 논란에 관하여
- 한 작가의 두 가지 이름,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라는 소설로 56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만들어내어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고, 1975년에 다시 공쿠르 상을 받는다. 그는 정체가 탄로날까 봐 상을 거부했고, 출판사에서는 광고를 통해 작가를 찾기까지 했다. 기자들이 로맹 가리를 향해 에밀 아자르와 동일인이 아니냐는 증거를 찾아낼 때마다 부인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 긴 에세이와 함께 진실을 밝힌 기이한 행각을 벌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자작극을 벌였을까?
이미 명망 있는 작가였는데도 굳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런 시도를 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자 그 시도가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 317 / 로맹 가리가 유서처럼 남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에세이 중에서
그는 세간의 고정된 이미지 속에서 이미 ‘퇴물 작가’로 취급받고 있었다. 아무리 역작을 써도 평가는 색안경에 갇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친한 이조차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을 리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p. 318)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내 경험을 떠올렸다. 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내 고향에 있는 대학에 가는 일이 끔찍히도 싫었던 내 열아홉에서 스무살 언저리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짚어본다. 그것은 단순히 인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 누구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까봐 망설여졌던 일들도, 낯선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쟤가 저런 행동을 해?'라고 생각할 법한 행동들도 대학에 와서는 막 할수 있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더 담대해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로맹 가리가 벌인 자작극이 통쾌하면서도, 타인을 바라볼 때 우리가 쓸 수밖에 없는 색안경과 평가의 잣대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작가라는 이름도 결국은 얼굴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시선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글쓰기라고 생각했는데, 로맹 가리의 삶을 읽으며 작가로 사는 것도 결국 매순간 평가받는 인간으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