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으로 두어도 괜찮은 나날들
이별은 언제나 마음의 모양을 다시 그리게 한다. 최근에 연인과의 이별을 겪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은 상대라고 생각했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워 붙잡았다. 그러나 상대는 완강했고, 그날 이후 나는 왜 그렇게 붙잡았는지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상대를 정말 사랑해서 붙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상대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나 나의 가치관에는 별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고, 나도 상대방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사랑했던 사람이 이제는 완전 남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렇게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영상을 찾아보았다. 사실 연인과의 이별은 이전에도 몇 번 겪은 터라, 이미 본 영상도 많았다. 그중 새롭게 마음을 붙잡은 것은 바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었다.
즉문즉설에는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연애 고민 정도는 인생에서 반드시 몇 번은 거쳐 가는 과정으로 여겨지고, 스님께서도 쉽게 해답을 주시는데 바로 그 지점이 위로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법륜 스님이 그 일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으셨다. 스님은 성심성의껏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신다.
마음이란 건 어때요? 늘 변하는 것이 본질이에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우리가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타성에 젖는다거나 권태로워진다고 생각하지, 그런 마음 자체가 본질이라는 관점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잘 지내다가도 문득 슬퍼질 때가 있지만, 바쁘게 지내다 보면 슬픔 또한 고여 있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간다. 그런데도 마음은 계속 허하고, 공허한 틈을 사람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경계한다. 이런 시기에 외롭다는 이유로 인연을 쉬이 맺어온 나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공허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왜 홀로인 것이 두려울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안전함을 느낄까?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타고난 성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익히고 실천해야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사랑에 자꾸 ‘빠지려’ 들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행위’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위하려면 오랜 노력이 필요하고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수동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형태의 감정에 익숙해져 있기에, 홀로인 게 어색하게 느껴지곤 했다.
주변에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냥 가볍게 만남을 시작해 봐도 아직은 괜찮은 나이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마인드로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를 보냈다.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진짜 내 안의 ‘나’와 소통하는 법을 지금 터득한다면, 앞으로 더 현명한 30대와 중년의 시기를 보낼 수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관성대로 살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의지라기보다, 뇌는 자신이 익숙하다고 느끼는 상태를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을 찾는 습관이 들면, 나이가 들어서도 똑같지 않을까.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가벼운 만남을 계속하다 보면 진짜 대화가 통하는 상대와의 만남을 놓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는 조금 더 신중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