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잔
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을 봤는데 오늘따라 내가 잘 생겨 보인다면,
정말 그런 걸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여기 세 개의 잔이 있다.
잔에 담긴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는 잔이다.
퇴근 후,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싶어 냉장고를 열었다.
손이 가는 대로 소주를 꺼냈는데 뭔가 기분이 울적했다.
딱히 우울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소주를 꺼낸 내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뭐가 문제일까?
일단, 소주를 문제 삼았다.
특히나 혼자 술을 마실 때, 소주만큼 처량해 보이는 술도 없으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와인을 꺼내 들었다면 조금은 우아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또 하나, 소주잔을 트집 잡을 수 있겠다.
나는 왠지 이 잔이 처량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삶의 애잔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내 마음도 처량해진 게 아닐까?
물론, 나는 애꿎은 소주와 소주잔을 들먹이고 있다.
처량하다고 느낀 내 마음은 아무 문제없다고 단정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으니 소주와 소주잔을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나에게 와인은 없었다. 다만 와인잔이 있을 뿐.
찬장에서 와인잔을 꺼내 오고 그 와인잔에 소주를 따라 봤다.
그런데 웬걸, 이 어색한 조합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치 화이트 와인이 담겨 있는 와인잔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분위기도 달라졌다. 소주잔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시각적으로도 엘레강스한 느낌이랄까?
나는 와인을 마시듯 잔을 가볍게 돌리면서 소주를 한 모금 삼켜 봤다.
음, 와인잔의 풍만한 바디가 소주에 없는 풍미마저 한껏 끌어올려 준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의 얄팍한 마음은 한껏 고상해졌다.
아까의 처량함이란 오간데 없이 말이다.
고작 잔 하나 바꿨을 뿐인데.
그날 이후, 나는 소주를 와인잔으로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그날의 교훈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결국엔 마음이 지어낸 일이다.
결국엔 마음이 지어낸 일이야.
어차피 소주일 뿐.
'월향의 잔'을 아는가. 그것은 술을 부르는 잔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을 벌컥벌컥 마시게 끔 마음을 움직이는 잔이다.
국내 막걸리 전문점 중에 '월향'이라는 꽤 유명한 곳이 있다.
한참 국내에서 유명세를 치르더니 몇 년 전 막걸리를 가지고 일본 오사카로 진출했다.
이 맛있는 막걸리는 일본 사람들의 입맛까지도 사로잡을 줄 알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은 막걸리를 홀짝 거리기만 할 뿐, 많이 마시지 않았다.
맛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하는데 정작 술은 홀짝 거리기만 하니 판매량이 시원치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월향의 사장은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어느 컨설턴트의 조언을 듣게 되었다.
그 컨설턴트의 조언은 매우 간단했다.
막걸리잔으로 쓰는 도기잔을 치우고 맥주잔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월향의 사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막걸리를 맥주잔에 따르라니, 그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막걸리는 탁주이기 때문에 맥주잔에 따르면 앙금이 남아 보기가 흉할 뿐이었다.
속는 셈 치고 바꿔보라는 컨설턴트의 말에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맥주잔을 사용해 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걸리를 홀짝거리던 일본 사람들이 맥주잔을 내밀자 마치 맥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문제는 도기잔이었다.
한국에서 도기잔은 막걸리잔으로 쓰이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도기잔이란 차를 마시는 잔이었다.
따라서 다도문화를 접하듯 막걸리를 홀짝거렸던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일본 오사카에서 '월향의 잔'은 도기잔이 아니라 맥주잔이 되었다.
덕분에 월향은 막걸리의 매출이 급상승하여 일본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잔을 바꾸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결국엔 마음을 움직이면 되는 것.
똑같은 막걸리일지라도.
'원효의 잔'을 아는가.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구역질이 나는 잔이었다.
어느 날, 열심히 수행에 정진하던 원효 스님은 더 이상 자기 공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경전이 있고 큰 스승이 많은 중국을 동경하기에 이른다.
마음이 중국에 가 있으니 결국엔 몸도 따라갈 뿐.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바다로 향하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져 토굴 속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 늦은 밤이 되었고 하는 수 없이 토굴 속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잠을 자던 원효 스님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났다.
사방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손을 벗어 주변을 더듬어야 했다.
그랬더니 재수 좋게 그릇 하나를 잡을 수 있었고, 그 그릇으로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아주 꿀맛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원효 스님은 옆에 있는 해골을 보자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자신이 잠들었던 토굴은 무덤이었고, 밤 중에 물을 떠 마신 그릇은 다름 아닌 그 해골이었다.
원효 스님은 갑자기 왈칵 구역질이 났다.
한참 구역질을 하는데 갑자기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꿀맛처럼 달다고 느껴졌는데 이제는 더럽다고 구역질을 한다?'
원효 스님은 그 순간 비로소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
한 생각이 일어나니 모든 것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지네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지어낸 것이거늘
- 원효
그렇게 무덤에서 나온 원효 스님은 중국으로 가지 않았다.
자신이 동경하던 중국도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았다.
해골잔의 물처럼
결국엔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