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힘
아주 오래전, 미국 보스턴의 어느 공대에 다니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고학생이었고, 하필이면 엄청 부자인 지방 유지의 딸과 사랑에 빠졌으며,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여자 집안의 반대로 무척이나 힘든 사랑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을 갈라놓기 위해 여자 집안에서 딸을 멀리 친척집으로 보내버렸다.
남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헤매야 했고, 이내 몸과 마음이 지쳐버리고 말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너무나 그리워 무작정 찾아간 그녀의 집 앞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는다.
“나, 내일 결혼해.”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주저앉고 싶은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내가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만 내 곁에 있어줄래?”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담배를 물었다.
그러나 당시의 담배는 종이에 말아 피는 잎담배였기에 순식간에 타 들어가고 말았다.
남자는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아, 뭐 이렇게 빨리 타는 거야......'
이내 담배는 그 끝을 보이며 남자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고, 그렇게 그들은 헤어져야만 했다.
그녀와의 짧은 마지막 순간에 한이 맺혔던 남자는 금세 타 들어간 담배를 원망했다.
그 원망은 사업 동기로 발전했고 그는 세계 최초로 필터가 있어 천천히 타는 담배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그 필터 담배로 보란 듯이 성공해 부자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그녀의 불행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일찍 죽었고 그녀 혼자 병든 몸으로 빈민가에서 외로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아직 널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당황한 그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결정을 미루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목을 맨 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슬픔에 잠긴 그는 그녀가 그리워 방황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자신이 개발한 필터 담배에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것이 ‘말보로(MARLBORO)’다. 말보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의 이니셜이었다.
남자는 언제나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사랑을 기억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파되었고, 이후 말보로는 시련당한 남자들이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기호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말보로는 남성미를 더욱 강화해 거친 카우보이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렇게 남자의 마초적 본능을 상징했으나 말보로의 카우보이 모델이었던 2명이 전부 폐암으로 사망한 것을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나친 흡연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따진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말보로의 러브 스토리는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스토리의 배경도 미국이었지만, 사실 말보로는 필립모리스라는 영국 기업이 만든 영국 담배다.
1924년, 말보로가 처음 시판되었을 때는 여성 전용 담배였으나, 판매가 부진하자 1950년대 후반부터 타깃을 바꿔 남성 흡연자를 공략하게 되었다.
말보로의 러브 스토리도 그러한 전략 하에 미국의 천재 카피라이터 ‘레오 버넷’에 의해 탄생한 스토리텔링 광고였다.
어쨌든 진실공방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 좋은 이야기가 관심을 모으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담긴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며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스토리텔링 [형용사] 이야기를 하는, 거짓말을 하는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이란 의미가 다소 거슬리긴 하는데, 이야기의 힘은 거짓말하기가 아니다.
좀 더 완곡한 표현을 빌리자면 ‘극화(劇化)’라고 할 수 있다.
즉, 잘 만들어진 드라마처럼 짜임새 있는 ‘픽션(fiction)’이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단순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정보의 전달만을 의미하며 듣는 사람의 머리에 호소하는 논리적 메시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감성 메시지이며, 듣는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닿게 하는 힘이 있다.
메시지를 가슴에 전달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불륜마저도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소재로 생각해보자.
만약 이것을 단순한 사실적 정보, 즉 뉴스로 접했다면 반응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져버린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며, 불륜이기에 욕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적인 소재에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면 어떻게 될까?
즉,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드라마 작가의 손을 거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애절한 러브 스토리로 만드는 것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을 콸콸 쏟게 하고, 더 이상 형부와 처제가 이어지기엔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게 만든다.
그런 다음 마지막 회 방송을 앞두게 되면 아래와 같은 글들이 시청자 게시판을 도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발 그 둘이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ㅠㅠ'
이렇게 뉴스와 다른 결말이 생긴다면 그 힘은 무엇일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는 메시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렇게 성공적인 스토리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텔링의 대가로 불리는 로버트 매키(Robert McKee)에 따르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동하는 이야기에는
정형적인 패턴이 있는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공은 힘든 상황에 놓여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미션이 주어져야 한다.
심지어 미션 완수를 방해하는 강한 저항(방해자 또는 현실)이 존재하게 된다.
주인공은 이에 굴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결국엔 성공한다.
이것이 감동을 주는 스토리의 정형적인 패턴이다.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기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스토리에 대리만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삶을 스토리텔링 한 적이 없기에 단순한 기억의 파편들만 흩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어느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삶을 스토리텔링 한 적이 있었다.
자세한 언급은 그렇지만, 불운한 사고(?)로 벌점이 초과하여 운전면허를 취소당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다행히도 국민행정심판을 통해 <생계형 운전자>로 인정받으면 구제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해당 심판을 신청했더니 재산 조사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 소개하는 기초자료를 작성해야만 했다.
문제는 <생계형 운전자>로 인정받으려면 나를 최대한 불쌍하게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작성했다.
'저는 집도 있고 차도 있지만 빚도 많이 있습니다...... '
이렇게 시작된 나의 스토리는 노총각의 신세한탄과 더불어 얼마나 찌질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내 삶의 여러 가지 단편적 사실들을 매우 부정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작성했다.
결국엔, 모든 필력을 총동원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루저'로 만드는 스토리텔링에 성공해 버렸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은 '루저 이야기'는 써먹지도 못했다.
2014년 초, 갑자기 시행된 <박근혜 대통령 특별사면>을 통해 내 운전면허가 저절로 부활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엔 이것이 해피앤딩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행복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점철된 내 이야기가 한동안 나를 지배하여 진짜 루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부정적인 관점으로 회상하는 것.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 각인된 스토리텔링은 사람을 무척이나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 역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들이 저절로 이야기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을 반영한다.
자신이 어떤 관점으로 기억을 연결하는가에 따라 스토리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이라는 것은 지금도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차피 삶이란 벌어지는 사건들의 나열일 뿐, 그 의미는 살아가는 자의 관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 하기 나름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해 보길 권한다.
장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코믹이던지, 멜로던지, 공상과학이던지, 막장이던지,
다만 당신이 어쩌다 우울해졌을 때,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이길 바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우울했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