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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Jul 12. 2019

각자의 시간이 있다

[예전에 쓴 글]

[시간]에 대한 딴생각

각자의 시간이 있다


독일 바이마르(Weimar)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 시.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괴테가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도시다. 1999년에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글로벌 에세이 콘테스트가 열렸다. 그런데 에세이 주제가 독특했다. 그것은 '시간'이었다. 다소 추상적인 주제인 만큼 부연 설명도 함께 있었다.

시간 - '과거로부터 미래의 해방, 미래로부터 과거의 해방'

주제보다 부연 설명이 더 어려운 이 콘테스트는 당대 내로라하는 철학자, 교수,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의 철학을 언급하거나 플라톤을 소환하거나 심지어 오래된 선종 불교의 '화두'를 끄집어 내기도 했다.

과거-현재-미래가 종횡무진하고, 차라투스트라가 어떻게 말했는지를 얘기하고, 시간의 형이상학과 패러독스를 묘사하는 묵직한 에세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많은 철학적 시간 개념을 끄집어 낸 그들의 에세이는 솔직히 말해서 시간을 이해하는데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이름조차 낯선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보는 것과 같았다.

메리케이 타임 와이즈 데이 크림, SK2 RNA 파워 레디컬 뉴에이지 크림, 피지오겔 데일리 모이스쳐 테라피 인텐시브 페이셜 크림, 엘리자베스아덴 어드벤스드 세라마이드 캡슐즈 데일리 유스 리스토어링 세럼 등등...

동안 피부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 화장품 작명법은 니체의 시간 개념인 <영원 회귀>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평범한 우리는 그런 시간을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시간이란 화장품 뚜껑 위에 쌓인 먼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망각했던 시간이다. 화장은 했지만 청소를 까맣게 잊고 지냈던 시간의 흔적이다.


에세이 콘테스트의 대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수상자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 사람은 저명한 철학자도 교수도 작가도 아니었다. 묘령의 러시아 여인, 이베타 게라심추쿠였다. 그의 에세이에는 하이데거라든지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의 심오한 시간 개념이 언급되지 않았다. 젊은 대학생답게, 그냥 시간은 바람 같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베타 게라심추쿠의 시간 에세이 '바람의 사전'


시간은 바람이다. 신에게는 절대적인 시간이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시간이란 바람 같은 것이다.

이베타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미래를 추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보단 과거를 소중히 여긴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간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에세이에서 전자는 '과거로부터 미래의 해방'이고, 후자는 '미래로부터 과거의 해방'이다. 이렇게 콘테스트가 제시한 주제와 부연 설명까지 에세이에 모두 담아냈다.

이베타의 <바람의 사전>을 읽다가 '딴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시간이란 절대적이지 않고 관념적이었다. 관념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시간은 기다리는 자에겐 너무 느리고, 걱정하는 자에겐 너무 빠르다. 슬퍼하는 자에겐 너무 길고, 기뻐하는 자에겐 너무 짧다. 초조한 자에겐 너무 더디고, 어리석은 자에겐 항상 이르다. 시간은 관념이다.

우리에게 10분이 남았다는 절대 시간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게 퇴근 시간인지, 인생의 종말인지에 따라 의미를 가질 뿐이다.

시간의 흐름이란 우주의 팽창과 관련 있다.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우주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시간이다. 저 우주의 끝은 이미 1,000억 년을 팽창했을지도 모른다. 지구는 고작 빅뱅 이후 137억 년이 지난 시점이다. 만약 절대적인 시간이 우주의 시간이라면 우리는 863억 년 전의 과거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우주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863억 년이 지난 후에야 그 미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주가 너무 광범위한 얘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가까운 태양을 떠올려 보자.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동원하자면, 태양에서 발사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분 20초라고 배웠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태양이 사라져도 지구는 8분 20초 동안 일광욕도 하고 태양광 발전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태양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구는 8분 20초 후의 과거가 된다.

천체물리학자들은 광활한 우주의 시간을 근거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우주의 과거일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미래를 계획할 뿐이다. 이 지구가 863억 년짜리 해묵은 과거일지라도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따름이다.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도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 또한 관념적이다. 시간관리 전문가들은 우리가 시간을 게을리 쓴다고 말한다. 하지만 슬로 라이프 운동가들은 우리가 시간을 빠르게 쓴다고 말한다. 자연의 시간을 무시하고 가속화된 경제의 시간에 매몰되었기에 닭장 속에 갇혀 빨리빨리 사육되는 예민한 닭처럼 인간성이 포악해졌다고 주장한다.

지리학자라면 지구 시간대나 날짜 변경선을 얘기할 수도 있다. 지구 자전과 반대 방향으로 세계 일주를 하면 하루가 공짜로 생긴다고 얘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자면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이 빠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캘리포니아가 뒤처진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CEO가 됐지만, 50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또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됐지만 90세까지 살았다. 바이마르의 글로벌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수상을 한 10명은 대부분 40~50대 였다. 하지만 대상 수상자인 이베타 게라심추쿠는 20세 였다.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다. 그들에게 절대적 시간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났다는 것은 언제를 말하는 걸까?

이미 늦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미 끝났다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각자의 시간이 있다

 - [시간]에 대한 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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