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모임에 참여하는 일은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최근 기억나는 모임이라면 패션지 에스콰이어가 주최했던 '위스키 시음 모임'이 떠오른다. 금요일 저녁 7시부터 진행됐던 그 모임은 날이 저무는 분위기에 걸맞게 재즈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재즈 선율을 따라 무르익은 밤의 문턱을 넘은 사람들은 장소를 옮겨 작은 조명 아래 동그란 스탠딩 테이블이 놓인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마치 클럽을 연상시키는 듯한 분위기에 한쪽에는 나비넥타이를 맨 바텐더들이 수많은 위스키 잔들을 능숙하게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위스키 잔을 들고 '맥켈란'이라고 표시된 커다란 화면을 주시했다. 그러자 맥켈란의 위스키 전문가인 앰베서더가 시음하게 될 위스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시간은 흘러 밤은 더 깊어졌지만 어두운 조명은 더 붉게 빛이 났다. 패션 관계자들이 많이 모인 탓인지 사람들의 복장은 밤에 어울리게 화려했고, 시음이라는 명분 아래 수없이 들이킨 잔들 속에는 유난히 빨간색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화려한 분위기에 몽롱한 취기가 더해져 이상하게 기분이 들뜬 모임이었다. 모임을 주최한 편집장과 관계자들은 초대 손님들을 서로 인사시켜 주느라 바빴는데,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해 줄 때마다 내가 무엇이 된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타인으로부터 내가 소개되는 일, 나를 소개할 때 어떤 표현을 쓰는지 그것을 듣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모임에선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나란 존재가 어떤 무엇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나와 똑같은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연출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모임의 즐거움이란,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모임이란 유일무이한 대안 세계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의 나를 내려놓는 일, 그 시작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새롭게 소개하는 일이다. 늘 하던 대로 명함과 똑같이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또 다른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소개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리니지 혈원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면 내가 어떤 마법사인지 밝혀야지 굳이 "저는 신규사업팀 오민수 차장입니다"라고 소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정체성이란 정신분열증이나 자아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다양한 SNS 계정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가진 지 오래다. 인스타그램의 나와 페이스북의 내가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Daum '브런치'에서 나는 에세이 작가로 활동하지만, 유튜브에서 나는 곤충 영상에 집착하는 오타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나는 실내 인테리어 마니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SNS 계정마다 똑같지 않은 프로필처럼, 내가 가진 다양한 페르소나(사회적 가면) 때문에 나란 사람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다양한 모습과 감춰진 속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나의 본성이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회사에서는 신사업 기획자이지만 마법사이기도 하다. 또한 에세이 작가이자 곤충 채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어느 독서모임에 회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언어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독서 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은 매달 12명이 모이는데 주인장과 진행자만 고정일뿐 나머지 참석자들은 매번 신청을 받아 새롭게 모이는 독서 모임이었다. 모이는 장소가 매번 바뀌고 주제도 매번 바뀐다. 어떤 달은 '나에게 위안이 되어준 책'을 주제로 하지만 어떤 달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 책'을 주제로 하기도 한다. 각 주제에 맞게 자신이 고른 책을 가져와서 왜 위안이 되었는지 또는 왜 불편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여러 개의 책이 등장하기도 하며 각자의 생각을 듣다 보면 때론 어수선하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의 독서모임이 생소한지라 매력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이 모임에선 직업이나 소속을 밝혀서는 안 된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3가지로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
그 3가지가 무엇이 될지는 표현하는 사람 마음이다. 자기 취향을 3가지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최근 근황을 3가지로 말할 수도 있다. 이 점이 흥미로웠다. 나는 참석할 때마다 매번 다르게 나를 소개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애주가'라는 키워드로 나의 주류 정체성을 밝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전직'이라는 키워드로 내가 생각했던 퇴직 후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내가 창작한 시를 낭송하며 사람들의 호응을 받은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작정하고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논란을 유발하기도 했다. 나는 소개할 때마다 매번 다르게 나를 소개했지만 그 모든 것이 영락없는 나였다.
물론 '신규사업팀 오 차장'이란 사람은 회사에선 술자리를 자제하고, '퇴직'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지도 않으며, 회사에서 시를 낭송하는 일이란 상상할 수도 없고, 여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논쟁하는 일이란 미치지 않고서는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 차장은 마법사다. 동시에 에세이 작가이며 실내 인테리어 마니아이고 이상한 독서모임에 회원이다.
행여나 '오 차장'은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출근하는 삶'과 '퇴근하는 삶' 모두에 균형을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가 아니다. 나는 단지 '양(陰)'이면서 동시에 '음(陽)'일뿐이다. 나는 어느 한곳에 고여있지 않은 '흐름'이며,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오행'의 조화에서 이탈하지 않은 존재감일 뿐이다. 나는 방황하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 중이며, 만약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그것은 어느 시점의 나일 뿐이다.
직업 역시 나의 정체성이다. 모임에서 직업을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를 소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직업이 탄로 나기도 한다. 직업적 언어 습관이 몸에 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언어의 정원' 독서모임 진행자인 황보혜경님(모임에선 이름 뒤에 '~님'을 붙여서 호칭한다.)은 목소리만 들어도 직업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녀는 아나운서다. 말을 할 때 딕션이 귀에 꽂힌다. 일반인의 말하기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독서모임을 진행하면 마치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내가 참여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언어의 정원' 주인장인 김정원님은 기상캐스터 출신이다. 그녀는 회원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최근 TV 프로그램 <연애의 맛>에 출연하는 바람에 과거 프로필이 공개되고 말았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그녀는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책방 언니'이며, 인스타에서 그녀는 '해장 독서'를 즐겨 하는 와인 애주가다.
독서모임 '언어의 정원' 진행자 황보혜경 (아나운서)
독서모임 '언어의 정원' 주인장 김정원 (연애의맛)
'언어의 정원' 독서모임에는 이렇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간혹 본업이 들키게 되면 일부러 모른 척 하기보단 본업과 관련된 질문을 태연하게 묻기도 한다. 투자 본능을 들켜버린 주식 전문가님에겐 장외 주식에 대한 정보를 묻기도 하고, 선생님 말투를 들켜버린 초등 6학년 담임 선생님에겐 '교실 환경 개선 사업'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나의 회사 업무와 관련 있어서). 하지만 이 독서모임에선 친목보다는 '건강한 개인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너무 사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언어의 정원' 주인장인 김정원님은 강남 논현동에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간혹 '금수저'로 오해받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넉넉하게 차린 서점은 아니다. 청년창업자금을 대출받아 3년 동안 준비하고 마련한 작은 서점이다. 그녀는 청년 창업가다. 방송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생업이다 보니 다양한 수익 마련을 위해 독서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제는 다양한데 문학, 미술사, 철학, 영화, 미식, 와인, 다도, 자유 독서 등 여러 가지 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중 아나운서 황보혜경님이 진행하는 자유 독서 모임이 내가 참여하는 모임이다.
모임은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앞서 얘기했던 화려한 복장에 근사한 술을 마시며 나를 대신 소개해 주었던 패션지 모임도 좋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새롭게 소개할 수 있는 모임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내가 참여하는 모임이 나를 규정하진 않는다. 다만, 모임에 참여하는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모임의 진정한 의미란,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