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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Jun 28. 2020

취향은 계급일까?

내 취향은 귀족적이고, 내 행동은 대중적이다.

- 빅토르 위고



나는 마놀로 블라닉을 신고 산책하고 싶다는 여성의 기분을 모른다. 악마가 프라다를 왜 입었는지도 모르겠고, 남자친구보다 에르메스 핸드백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여자의 욕망도 도대체 모르겠다. 처음엔 내가 남자여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칸트의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취향이지만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누구나 공감하는 취향도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취향을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고 한다. 아마도 여자들에겐 마놀로 블라닉과 프라다와 에르메스에 반응하는 공통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 공통감이 없는 사람에게 있다. 공통감은 교양이나 지적 수준, 에티켓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마치 교양이 없거나 무식해 보이거나 무뢰한 사람처럼 구분되기도 한다. 실은 내가 그랬다. 나는 명품 브랜드에 대한 기호가 없었다. 이런 취향과 공통감의 부재가 상대방과 나를 구별짓는 잣대가 될 줄은 몰랐었다.


아주 오래전, '갈색병'이라 불리는 고가 화장품이 피부에 마법을 부리던 시기에 그 화장품 브랜드인 '에스티로더'에 다니는 여성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에스티로더가 미국 화장품 브랜드라는 얄팍한 지식만을 갖고 있을 때였고, 그 여직원으로부터 받은 갈색병을 남성용 스킨로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지나가던 회사 여직원에게 버릴 만큼 무지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루이비통으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루이비통의 브랜드 가치와 사회적 명성을 모르는 나는 그냥 무슨 '통'으로 갔다는 기억만 남았고, 이후 어떤 콘퍼런스 행사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와, 반가워요! 여기서 보는군요. 이직한 회사는 지낼만해요? 그 뭐더라?"


갑자기 회사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문득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을 말해 버렸다.

"베네통인가요?"


그녀는 무척 당황해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저기, 베네통이 아니라 루이비통이에요."


그때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했어야 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드립을 치고 말았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루이비통하고 베네통하고 같은 계열사 아닌가요?"


당시 그녀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장벽을 치는 느낌이랄까? 무언가 우리 사이를 구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나는 그녀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그녀도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의외로 나에게 자괴감을 불러일으켰고, 루이비통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여성에게 줄 생일 선물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민스러운 것은 가벼운 선물을 주자니 왠지 서운해할 것 같고, 무거운 선물을 주자니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를 그런 관계의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이 애매한 관계를 동료 여직원에게 설명하자 곧바로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입생로랑 립스틱! 지구 상에 입생로랑 립스틱을 싫어할 여자는 없어요. 명품이니까요. 하지만 립스틱 한 개 정도면 가격이 부담스럽진 않을 거예요."


해결책을 들은 나는 그 화장품을 사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츄리닝을 입고 집을 나섰다. 화장품을 살 때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올리브영'에 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점원에게 물었다.

"입생로랑 립스틱 사러 왔는데, 어디 있나요?"


그 점원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당황스러웠다. 나를 바라보는 올리브영 점원의 표정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치 루이비통을 베네통이라 불렀을 때 보았던 그 장벽 같은 느낌. 잠시 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엔 뭔가 공통감이 부재하다는 것을 실감한 나는 올리브영 점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매장을 나와야 했다.


잠시 멍해졌다. 문득 내가 화장품 매장하면 떠오르는 게 '올리브영'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입생로랑을 사러 올리브영에 가는 대참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젠 두 번 다시 올리브영에 갈 수 없었다. 창피하니까. 나의 대참사 소식을 들은 후배 녀석이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형은 참 서민적이야. 가끔 형한테서 프롤레타리아 향기가 나. 쉽게 말해서 싼 티."



구별짓기


나는 서민이다. 고귀한 태생이거나 화려한 출신 따위하곤 거리가 멀다. 나에게 프롤레타리아를 언급했던 그 녀석은 부르주아다. 배경도 좋고 집안도 넉넉하다. 우리는 싱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주거양식은 달랐다. 나는 고양시 덕양구의 오래된 아파트에 거주하지만, 녀석은 서초구 반포동의 세련된 오피스텔에 거주한다. 나는 2000cc 국산차를 몰고 다니지만, 녀석은 3000cc 재규어를 몰고 다닌다.


우리는 한때 같은 직장에 다녔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속내는 달랐다. 녀석은 사회생활을 하며 여유도 즐기는 일명 '워라밸' 직장인이었다면 나는 여유를 야근으로 뒤바꾼 '생계형' 직장인이었다. 우리는 음주가무를 좋아했지만 취향도 달랐다. 내가 직장동료들과 소주에 삼겹살을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겼다면 녀석은 와인에 이베리코 하몽을 곁들인 데이트를 즐겨 했다.


내가 입생로랑 립스틱을 사러 올리브영에 갔던 충격적인 날, 왠지 나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녀석에게 SOS를 쳤다. 당시 서울에 입생로랑 립스틱을 살 수 있는 백화점이 몇 군데 없다는 사실도 그 녀석 덕분에 알았다. 그리곤 나에게 카톡으로 무언가를 보냈다.



나의 한심한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들은 내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 취향이 수준 미달 이거나 내 삶의 질이 그들보다 뒤떨어져서 생겨버린 격차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이유가 내 출신과 배경, 경제적 수준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즉, 사람의 취향과 습성이란 신분적 위계(출신, 배경, 소속, 경제력 등)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며 이에 따라 계급적 차별화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했던 말이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저서 <구별짓기 La Distinction>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너와 나 사이의 장벽, '구별짓기'가 벌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한 미학과 공통감 따위의 말들은 부르주아적 취향일 뿐이다. 부르디외는 칸트의 미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미적 취향이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잘 살아. 나는 저 사람보다 고상해. 나는 저 사람보다 수준 높아.'라는 내막이 취향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별짓기 하는 사회적 맥락이 곧 '미적 취향'이 된다.


부르디외에게 있어 취향이란 '고급 취향' 대 '대중 취향'의 대립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비통을 보고 베네통이라 말하는 것은 '취향 모욕'이며, 입생로랑을 사러 올리브영에 들어간 것은 '취향 모순'이 된다. 나의 취향은 과연 나일까? 정말 내가 원해서 선택했을까? 그렇지 않다. 내 취향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계급적 습관에 따른 버릇일지 모른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취향을 가진다. 새로 나온 최신형 스마트폰이 갖고 싶고, 쉴 때는 TV를 보며 소파에서 뒹굴고 싶고, 한잔하고 싶을 때는 소주에 삼겹살이 떠오른다. 노동자는 노동자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에 반해 자본가는 자본가의 취향을 가진다. 새로 나온 최신형 요트를 갖고 싶고, 쉴 때는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한잔하고 싶을 때는 와인에 이베리코 하몽을 떠올린다. 자본가는 자본가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와 같이 계급적이고 구조적인 사회 환경에 따라 자신에게 내재된 습성을 '아비투스 Habitus'라고 한다. 따라서 나의 취향이란 나의 개성이 아니라 계급적 습성일 뿐이다. 이것이 아비투스다. 사회 계급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 나의 취향과 행동 패턴.



개돼지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사실 아비투스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업(業)에 따르는 삶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와 동시에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마음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아비투스를 계급으로 규정하고 상위계층이 하위계층을 핍박하거나 멸시하는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폭력이 돼버린다. 아비투스의 서열화로 벌어지는 이러한 비물리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 symbolic violence'이라고 한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보여준, 혹은 실화로써 일부 고위층에서 언급된 '민중은 개돼지'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랜 옛날, 구텐베르크가 인쇄혁명을 일으킨 이래로 지식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대중들은 지식을 배우고 의식을 함양하며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런 대중을 '개돼지'라고 부르다니, 그들은 자신에게 내재된 아비투스가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기저에 깔려있다. 과연 그들의 아비투스는 남다른가? 그래서 그들의 취향은 우월한가?


그들에게 취향은 자본이다. 취향은 자본이 되었을 때 사회적 힘을 갖는다. 취향을 자본으로 만드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 소유 형태, 자격증 형태, 체화 형태가 그것이다. 소유 형태란 예술품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돈을 주고 명품을 사면 자기 취향으로 자본화된다. 자격증 형태란 자격, 학위, 졸업증 따위의 공인된 증서를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라이센스가 있는 취향은 곧 자본이다. 마지막으로 체화 형태란 좋은 취향과 안목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벌써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소유 형태와 자격증 형태는 경제력만 있으면 취득이 용이하다. 취향이 자본이 되어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으로 취향을 획득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간혹 재벌가의 사모님들이 유별나게 미술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체화 형태다. 좋은 취향과 안목을 자본으로 해결하려 해도 체화가 더딘 자본가나 사회적 고위층이 있다. 예를 들자면,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안목을 안목이라고 말할 수나 있는가. 그들은 배움이 더디고 인성이 더디고 체화가 더딘 자들이다. 혹은 교양이 시대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런 봉건주의적 시력으로 21세기를 살고 있으니 그들에게 내재된 취향과 안목이란 시대착오적이며 저급한 것이다. 그들은 아비투스를 착각하고 있다.


태생, 출신, 경제력이 상위계층이라고 해서 아비투스의 우월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아비투스에 있어 부르디외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목한 것은 이것이었다. 바로 체화된 취향과 안목.


한때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게이트가 그래서 흥미롭다. 그들이 가진 것은 돈과 권력이었다. 그런 수단을 무차별 남용하여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소유 형태) 딸에게 좋은 학교를 부정 입학시키고(자격증 형태) 심지어 귀족 스포츠도 강제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아비투스를 갖지 못했다. 즉, 체화된 무언가가 저급했다. 그래서 더욱 돈과 권력으로 저급한 무언가를 은폐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복잡하게 아비투스를 논할 가치도 없다. 쉽게 말하자면 '그릇'이 안 되는 자들이 사회 지도층 '노릇'을 했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그들이 벌인 상징적 폭력이 권력남용이었고 인권유린이었으며 무엇보다 적폐였기 때문이다.



각자의 개성


사회 계급에 따라서 접근 가능한 지식과 문화적 향유가 제한적이었던 과거 시대에는 계급적 습성인 아비투스의 서열화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신분에 따라 교양과 취향의 경계도 분명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대 변화의 파장은 그런 경계를 희석시켜 왔다. 부르디외가 살았던 20세기의 프랑스와 지금의 현실은 분명 차이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쭙잖은 개돼지의 눈으로 아비투스를 서열화할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으로 존중할 일이다. 물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적 불평등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사회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개인의 각성이 없는 한 무의식과 습관을 지배하는 아비투스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은 여전히 계급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각성이 없는 개인은 불평등에 익숙해진 채 살아가게 된다.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미 부르디외가 언급했다. 바로, 체화된 취향과 안목.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취향과 안목을 몸에 익혀 때로는 촛불로, 때로는 노란 리본으로, 때로는 투표로 계급적 불평등을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두의 개성과 인격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부르디외처럼 칸트의 미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부르디외의 취향은 독한 현실이었고, 칸트의 취향은 높은 이상이었다. 우리는 독한 현실을 바탕으로 높은 이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취향과 안목을 비로소 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마놀로 블라닉을 신고 산책하고 싶다는 여성의 기분을 모른다. 악마가 프라다를 왜 입었는지도 모르겠고, 남자친구보다 에르메스 핸드백에 키스하고 싶다는 여자의 욕망도 잘 모르겠다. 그 이유는 성별이나 계급적 습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단지 나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모습은 대중적이고 내 행동은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안목은 이상적이다.



영감을 준 자료

BOOK  구별짓기 上, 下 /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역 / 2005.12.05

BOOK  칸트 미학 / 크리스티안 헬무트 벤첼, 박배형 역 / 2012.09.15

BOOK  취향의 탄생 / 톰 벤더빌트, 박준형 역 / 2016.12.05

SERICEO  '나'라는 그릇 / SERIEO 콘텐츠팀 / 201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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