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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Aug 01. 2020

뒤샹의 변기 같으니라고


그림이 걸려있던 로비엔 그림을 지탱했던 철골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 그것을 처음 본 H는 그 철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림이 없는 철골엔 작가의 이름표와 작품 설명이 남아 있었다. H는 철골과 이름표 사이의 맥락을 쫓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마디 했다. "이 철골들이 작품인가 봐요. 가까이서 보니 철골들이 전부 다르게 보이긴 하네요."

방치된 철골이 아방가르드 한 시선을 넘어 난해한 개념미술로 승화하고 있었다. 아, 이런, 뒤샹의 변기 같으니라고... 초현실주의로 넘어간 철골을 다시 현실로 복원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는 원래 있던 그림의 행적을 알려 주었고, H가 본인의 민망함을 철골에 기대에 부르짖을 때 나는 매우 고소해 했다.


간혹 맥락이 없는 일들에 맥락을 찾아 헤매거나 맥락을 만드는 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어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한 남자가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 싱거운 놈이 다 있네' 하면서 나도 변기 앞에 섰다. 그리곤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변기는 남자를 별 싱거운 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건 변기 위의 그림 때문이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그림이 변기 앞에 선 남자에게 이상한 고양감을 주었다. 맥락이 없는 그곳에 그림이 맥락을 부추겼고 남자는 초현실주의적 자신감에 고무되어 지퍼를 올린다. 정말이지 뒤샹의 변기 같으니라고... 내가 한동안 그 화장실을 애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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