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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Nov 04. 2019

책에 대한 딴생각

책은 문명의 이기심

책은 문명의 이기심




"어떻게 그런, 너무 야만적인 행동 아닌가요?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 띤 얼굴이더니 어느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그때까지 대화의 주제가 '독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상한 주제가 '야만적인 행동'으로 끝이 나려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필요한데, 우린 고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 날은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 초대받은 날이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 모임에 누가 모이는지 사전 정보가 없었던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이 도착했고 다행스럽게도 나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났고 독서 모임에서 만나게 될 줄을 몰랐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지난 며칠간 읽었던 네 권의 책을 얘기했다. 그렇다고 네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었고, 전자책으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는 '발췌독'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너무 야만적인 행동 아닌가요?"


그녀가 말하길, 책이란 작가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쓴 결과물인데,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올바른 독서가 아니며 전체를 읽지 않았으니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독서라는 것이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야만인이 될 것까지야. 하소연을 할까 했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진지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녀에겐 독서에 대한 어떤 신념이 있는데 내가 그걸 건드린 모양이었다.


내가 발췌독을 한 이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의 책을 빠르게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보다 입체적인 지식 습득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나의 독서 취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지한 신념을 나의 취향으로 대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행위'가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독서 예찬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내가 읽었다는 전자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종이책이 가진 고유한 '아날로그적 손맛'이 있는데 전자책은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했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려는 것은 마치 '문명의 이기심'과도 같으며 결국엔 종이책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자신도 전자책을 읽어본 경험은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이라든지 책 냄새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적 감수성'을 전자책은 절대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자책은 '문명의 이기심'이라니, 일단 표현이 참신했다. 듣고 보니 독서 예찬이라기 보단 종이책 예찬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냉랭함은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문학소녀의 표정으로 종이책을 예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딴생각이 들었다.


‘전자책이 문명의 이기심이라면, 종이책도 한때는 문명의 이기심이라고 비판받았던 시대가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인류 역사란 이상하게도 반복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현재와 같은 종이책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였다. 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 일어났고,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책들이 인쇄되어 쏟아져 나왔고, 바야흐로 '독서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인쇄된 책은 16세기 사람들에게 문명의 이기심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인쇄된 책이 아니라 필경사들이 손으로 쓴 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쇄된 책이라니, 그것은 '인간적인 손맛'을 느낄 수 없는 매우 싸늘한 책이었다.


사람들은 인쇄된 책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필경사가 한 자씩 쓸 때마다 글씨가 달라지는 자연스러움이 없는 너무나 기계적인 글씨였다. 진정한 독서의 맛을 떨어뜨리는 책이며, '서정적 감수성'이 결여된 문명의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6세기가 지나 오늘날에 이르렀다. 구텐베르크 시대의 '문명의 이기심'은 지금 시대의 문학소녀에게 '서정적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종이책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히려 필경사란 직업이 사라졌다. 오늘날의 문학소녀에겐 필경사가 쓴 '인간적인 손맛'이란 알 턱이 없으며 '아날로그적 손맛'이 그 서정적 감수성을 대신하게 되었다.


감수성이란 그 시대 정서를 반영할 따름이다. 그 시대 정서란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감수성이다. '인간적인 손맛'은 '아날로그적 손맛'으로 감수성이 대체되었다. 전자책이 지금 시대의 감수성으로는 어색할지 몰라도, 미래의 문학소녀에게 '터치스크린의 손맛'이라는 또 다른 감수성을 느끼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더 깊이 딴생각을 해보자면, 어쩌면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문명의 이기심'으로 조명해 볼 수도 있다. 필경사가 손으로 쓴 책이든 인쇄된 책이든, 어쨌든 책은 책이다.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문명의 이기심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인류 역사란 이상하게 반복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이 인물이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문자를 읽어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 즉,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필경사처럼 문자를 기록하는 글쓰기마저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책과 글쓰기를 가능케 해주는 문자 자체를 비판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사람들이 글로 기록하면 배운 것에 대해 너무 안일해진다고, 글을 읽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복음을 기록한 <파이드로스>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글을 읽어 아는 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일뿐이오." (파이드로스, 275장 b절)


"문자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에만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게 될 것이오." (파이드로스, 275장 a절)


우리는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제대로 내면화하지 못하며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이 대화를 중요시하는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용을 듣고 내면화하고 암기해서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거나 질문을 하는 과정을 밟았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서는 내용을 내면화하고 암기하며 질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든지 생략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결국, 책이란 하나의 외형에 불과하다. 본질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다. 책은 시대 변화에 따라 점토판이기도 했고, 죽간이기도 했으며, 파피루스이기도 했다. 문명의 이기심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은 책의 외형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지만, 정작 내용을 습득하는 행위는 인간 본연의 의지에 맡겨 두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문자 비판'은 책 그리고 독서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소크라테스도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술문화 시대'와 '문자문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그 시대 정서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항상 다음 세대는 그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로, 또 다른 감수성으로 그렇게 진화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비판했듯이 그 어떤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크리톤>, <파이돈>, <향연>, <파이드로스>와 같은 책들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책들은 누가 쓴 것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쓴 책이었다. 그는 스승과 달리 글을 썼다. 그 책들은 스승의 말씀을 몰래 기록했던 플라톤이 남긴 유산이었다. 우리는 플라톤이 있기에 소크라테스라는 존재를 아는 것이다. 만약 플라톤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구전동화처럼 다뤘을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파이드로스>.

아니지, 그는 말만 했을 뿐 글을 쓰지 않았으니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라고 해야겠다. 내가 그 책을 처음 접한 것도 전자책이었다. 킨들(kindle)과 같은 전자책 전용 디바이스는 없지만, 내가 가진 스마트폰과 갤럭시탭을 통해 다양한 전자책 어플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디바이스를 무조건 문명의 이기심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외형이 뭐그리 중요한가. 어차피 본질은 내용인 것을. 오히려 전자책을 통해 책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더 늘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선, 디바이스는 검색이 용이하다. 어떤 주제를 검색하다가 자연스럽게 도서 검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자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도서정보나 책 미리보기 기능을 통해 내가 찾는 주제에 알맞은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심지어 책과 책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를 연관 지어 읽게 되었고, 결국 <파이드로스>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파이드로스>를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건 직접 책을 사서 봐야 해!"


서점에서 <파이드로스>를 직접 득템 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야릇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아날로그적 손맛이며 서정적 감수성이 충만한 잉크 냄새와 종이 촉감이었다. 순간,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전자책을 읽던 나는 어느새 종이책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나 역시 그 문학소녀와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 시대 정서에 녹아든 인간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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