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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Nov 20. 2020

헤디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에스콰이어 기고(2018.11)


'헤리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구글만 없었을까? 애플도 없고 삼성도 없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해진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이러한 무선통신 기술의 근간에 '주파수 도약'이라는 기반 기술이 있다. 용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이 기술을 발명한 사람은 믿기 힘들지만 아름다운 여배우였다.


그녀는 194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여배우이자 당대 섹시 아이콘이었던 헤디 라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백설공주>를 만들 때 그녀를 실사 모델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배트맨> 시리즈 '켓우먼'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헤디 라마가 처음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에 개봉했던 <엑스터시>라는 영화에서 였다. 이 영화는 여성의 오르가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최초의 영화로 화제가 되었다. 다만, 그 수위가 높아 당시 교황청에서는 이 영화를 몹시 비난했고, 히틀러 조차도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헤디 라마의 미모만 탐닉했을 뿐 그녀에게 지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그녀의 전 남편이자 무기 제조업계 거물이었던 프리드리히 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배우인 아내를 각종 모임에 대동하며 그녀의 미모를 비즈니스에 이용하기 바빴다. 심지어 군사 기밀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그녀를 옆에 두었는데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디 라마는 비상한 여자였다. 대화 하나하나에 집중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밤을 새우며 군사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매우 어수선했던 시기였다. 나치를 혐오했던 헤디 라마는 나치와 남편이 무기 거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곁을 떠나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배우로서 성공적인 입지를 쌓아가는 한편 틈틈이 군사기술을 발명하는 다소 이중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배우가 무슨 발명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녀의 지적 재능을 알아봐 준 사람은 영화 <아이언맨>의 실존 인물이었던 하워드 휴즈였다. 그는 헤디 라마에게 실험 장비 세트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과학자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와 지적 교감을 나눈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전쟁에선 독일군의 전파방해가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것은 연합군이 교신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하는 전술이었다. 라마는 연합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때 그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교란당하기 쉬운 하나의 주파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파수를 끊임없이 바꾸며 교신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주파수를 주고받는 송수신 매체가 서로 똑같이 호응하며 주파수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헤디 라마는 그 난제까지 해결했다. 이것을 가리켜 '주파수 도약'이라고 한다.


헤디 라마는 이 혁신적인 기술로 1941년에 특허까지 취득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고작 28세의 일이다. 그리고 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특허를 미 해군에 기증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기증받은 사람들의 태도였다. 미 해군은 어리고 예쁘장한 아가씨의 총명함을 싸늘하게 짓밟았다.


“아가씨가 이걸 발명했다고? 이봐 아가씨, 전쟁을 돕고 싶다면 나가서 전쟁 채권이나 팔아.”

실제로 그녀는 미 정부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만든 '전쟁 채권' 판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여정 속에서 할리우드 여배우의 명성으로 얼굴을 비추고, 춤도 추고, 심지어 경품으로 올라가 낯선 남자들에게 키스를 팔기도 하고, 군인과 투자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렇게 그녀가 팔았던 전쟁 채권 규모는 지금 시세로 따지면 3억 4,300만 달러(약 3,886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헤디 라마의 지적 재능이 무시당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42년 미군은 헤디 라마가 연합군의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그녀의 특허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주파수 도약'은 1급 군사기밀로 분류해 세상에서 감춰버렸다.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었던 한 여성의 노력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그동안의 삶이 그랬듯이 이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헤디 라마를 둘러싼 각종 스캔들, 사업 실패, 일곱 번의 결혼과 일곱 번의 이혼, 미혼모의 삶,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야 했던 은둔자의 삶.


헤디 라마의 숨겨진 업적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90년의 일이었다. <포브스>의 작가였던 플레밍 믹스는 MIT의 천체 물리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한 여인의 놀라운 발명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추적하다가 헤디 라마라는 위대한 발명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였다.


1990년 <포브스> 5월호, 처음으로 주요 언론에서 헤디 라마의 이름으로 '주파수 도약'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엔 미국 전자 프런티어 재단(EFF)이 그녀의 업적을 인정해 IT 공로상을 수여했다. 2015년엔 구글이 헤디 라마 탄생 101주년을 기념해 헌정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때 구글이 만든 캐치프레이즈는 다음과 같다.


"헤디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2017년 11월, 미국에서 헤디 라마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밤쉘>이 개봉되었다. 그리고 2018년 6월 7일,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오늘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업적을 모르지만 그녀가 발명한 '주파수 도약'은 와이파이와 블루투스가 되었고 우리의 피부같은 스마트폰에도 근간 기술로 담겨 있다.


헤디 라마의 첫 번째 남편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맨들은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의 마타하리'였다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헤디 라마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백치미를 가진 섹스 심벌이 아니었으며 팜므 파탈도 아니었다고, 사실은 ‘무선통신의 어머니’였다고.



에스콰이어 기고. 2018.11월호

기사 링크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36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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