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어때서
해를 넘겨 이전에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올해 4월, 출산을 앞두고 있는 동생이 있어 그 집으로 모이기로 했는데 대중교통으로 꼬박 2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무사히 도착했더니 배가 볼록하게 나온 동생과 먼저 도착한 부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 구경을 할 새도 없이 나보다 먼저 도착한 초밥과 메밀이 차려진 식탁으로 향했다.
배가 어찌나 고프던지 식탁 위 음식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고 동생이 내려주는 커피와 미리 준비해놓은 딸기, 롤케이크로 2차전을 시작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덧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계속해서 옮겨갔는데 임신한 동생이었다가, 부장님이었다가, 나였다가 돌고 돌아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지금은 같이 일을 하는 관계가 아니라서일까? 서로서로 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내가 "아, 저는 감정 기복이 좀 심한 편이거든요. 지금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폭이 컸어요."라고 말하자 둘 다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6년 넘게 함께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내가 감정 기복이 크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일희일비하고, 감정이 거의 롤러코스터급일 때였는데.' 나는 꽤 오래 나의 감정 기복 때문에 고생을 했고, 그 감정 기복을 줄이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시간 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회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는 동료들이 나의 그런 성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회사 일이 너무 바쁘기도 했고, 나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줄 만큼 편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회사 일이 너무 바쁘기도 했고, 같은 팀으로서 일한 것이 아니라서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어떻게 전혀 모를 수가 있지 싶었는데 심리 대학원을 나와 심리 상담 일을 병행하고 있는 부장님이 "우리 OOO, 가면을 쓰고 있었구나" 하신다.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도 '가면'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그런가? 그랬나 봐요."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더 늦게 동생 집에서 나왔다. 저녁까지 먹어가며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도 아쉬움이 남아 동생 출산 후에 좀 여유 있게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면'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이전에도 제법 친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는 편이거든, 내가 ~하거든요'라고 말하면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나한테서 그런 부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말을 해야,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해야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듯했다. 나도 나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나와 남들이 아는 내가 꽤 다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가는 데 가면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슬프다고 매번 울 수도, 기쁘다고 상황에 맞지 않게 크게 소리 내어 웃는 것도, 화가 난다고 화가 나는 대로 화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은 익명성을 보장해 주는 도구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하고 무도회를 즐길 수 있다. 가면무도회는 격식을 차리고 남들의 눈을 신경 써야 하는 일반적인 무도회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면'은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그러나 내가 쓰는 가면은 나를 방어하고 포장하기 위한 도구다. 가면을 쓴 나는 온전한 내가 아니다. 솔직하지 못한 모습의 나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나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부정적인 어감이지만, 결국엔 살아가기 위해 본인을 본캐와 부캐로 분리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 자신이기 전에 가정에서는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언니이자 동생이다. 회사에서는 직급과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또 다른 모임에서도 담당하는 역할들이 있다. 먼저 연락해서 약속을 잡는 사람이라거나, 회비를 걷어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이거나, 선택 장애 친구들 사이에서 메뉴를 정하는 사람이거나 등등. 모두가 자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바꾼다.
역할을 다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나와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역할을 다하느라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상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원래는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단 한 명이라도 기억했으면 한다. 그 단 한 명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아무도 내 본연의 모습을 몰라주더라도 나는 '나'를 오롯이 인정하고 이해해 줄 수 있었으면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결국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수도 있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하나 더 생겼다.
그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