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용기
오늘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애들 어린이집에서 입학 설명회가 있었다. 그것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마(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엄마 아빠를 이르는 말)의 몫이라 나도 충분히 긴장한 채 설명회에 참여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설명회는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끝날 기미가 보였다. 질의응답까지 마치니 한 것도 없이.. 아니 한 것도 많아서 많이 피곤해졌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남편은 저녁에 일이 있어 나 혼자 아이들과 셋이 있어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내 머릿속 누군가 말하기를
'아이들 낮잠 안 잤을 것이 분명하니 가서 함께 눕자! 이야기해준다고 달래고 셋이 누워있으면 낮잠(저녁 6시지만) 자겠지.... 그럼 나도 자고. 그러고 일어나면 밤잠은? 아 몰라... 뭐 어떻게든 자겠지.. '했다.
오 좋은데?
그러나... 운 나쁘게도....
어제도 일이 있어 아이들은 고모와 시간을 보냈고.. 최근에 퇴근이 많이 늦어져서 하원도 자주 늦어졌으며, 내가 좀 일찍 퇴근한다 해도 에너지가 없어 아이들과 찐한 시간 보낸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함께 떠올랐다.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다 같이 쉴 수 있기를 빌었다.
집에 와서 애들 아빠 보내고 일단 누웠다. 읽어달라고 기분 좋게 책 들고 오는 민이를 보니 더 피곤해졌다.
"응 읽어줄게......."
나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준이는 나가서 놀자 했다.
"으응... 나가자"
하면서 눈이 감겼다.
민이가 소리쳤다.
"어엄마! 왜 읽어준다 하고 안 읽어죠오오오???
순간
'아 귀 아픈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엄마 진짜 졸려! 눈이 안 떠진단 말이야...!'
이 말이 확성기 달고 입으로 나올 채비를 하는데!
설명회 끝나고 크레가 해준 말이 그 길을 막아섰다.
(크레파스는 일곱 살 준이 방 담임선생님이다. 내가 못 보는 아이의 단면을 보여주시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린이집 교사회 중 한 분!)
"어제 준이가 고모 온다고 낮잠을 안 잤어요. 무슨 비밀 말해주듯이 '나 좋은 일 있어 뭔지 말해줄까? 오늘 여섯 시에 고모가 온다고 했어. 그래서 설레서 잠이 안 와' 하더라고요. 근데 어제만 안 잔 건 아니고요... 요즘 준이 무슨 일 있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계속 낮잠을 안 자는데 제가 아는 준이는 긴장했을 때 낮잠을 안 자는 어린이라서요.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전해주세요. 터전에서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해요. 그렇게 좋아한다는 배드민턴도 왜 안 치는지 궁금했었거든요." 하셨다.
바로 전날 여섯 살 방 담임선생님 눈꽃께도 준이가 고모 온다고 너무 좋다고 하면서 낮잠 못 잤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근데 그때는 '아고 어지간히도 고모가 좋구나' 했는데 크레 말씀 들으니 달랐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뒤적뒤적 기억의 육아 수첩 더듬어보면서 내 실수 찾아 나선다.
'아이가 편안하지 않아 보인다'
는 선생님의 말씀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이렇게 들린다. 뭐 아닐 때도 있고 여유롭고 막 그럴 때고 있고 아무 걱정 없을 때도 있고 그렇지만 많은 확률로 그렇게 들린다.
그러면 찔리는 일 투성이다.
아이들은 정말 투명하다.
안에 있는 일은 어떻게든 밖에서 다 보인다.
물론 어른들도 투명하다.
나만 해도 뭐 놓치고 지각하고 다치고.. 그럴 때 보면 출발지가 내 안이라서..
(와.. 글은 역시 신기해.. 난 축구 이야기 쓰려고 창을 열었는데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고 있을 줄이야..)
암튼 (뭔지 모르겠고 정확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뭔가 있을) 내 죄를 씻고, 여전히 너희를 정말 사랑함을 증명할 좋은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딱!
밥을 먹이고 아이들과 나왔다. 준이는 몰랐는데 언제 챙겼는지 공을 안고 나가고 있었다. 신나게 앞장서 뛰어가는 아이들~ 기분이 덩달아 업되었다. 놀이터에 도착한 우리는 공 하나를 셋이서 열심히 따라다녔다. 크록스 신은 나는 몇 번이나 공과 함께 신발이 날아가는 모욕을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낄낄낄 좋아 죽는 두 아이 덕분에 크록스 신은 걸 뿌듯해하며 즐겁게 임할 수 있었다. 준이가 미끄럼틀 아래 틈을 골대라 하자는 제안 후 거기에 골을 세 번쯤 넣었을 무렵 행님 한 분이 행차하셨다. 아까 암벽등반 놀이기구 앞에서 네 살 민이에게 위협적으로 굴던 형이었다. 그 형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공을 드리블했고 나도 부드럽게 수비 자세를 취했다. 순간 준이가 게임에서 나가 그네 쪽으로 갔다. 그게 화나거나 삐친 행동은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구경꾼 모드로 전환한 거 같았다. 그네 앞 안전바를 잡고 거꾸로 매달린 준이.
"준아, 안 해? 엄마랑 형아만 한다? 민이도 하네. 민이 오! 민이가 형아 쫓아간다."
아 민이가 형아의 힘에 밀려 넘어졌다. 일으켜 세워주고 나와 민이는 또 형아 공을 뺏으러 따라갔다. 그러다 준이를 돌아보았다. 올빼미처럼 거꾸로 매달려 보고 있는 아들. 나는 다가갔다.
뭔가 터전에서의 일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준아.. 그냥 하는 거야~."
그리고 나의, 남편의..... 어떤 말이, 어떤 행동이 아이가 도전하고 패배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없게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엄마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준이만 알려줄게. 이기는 방법."
"어"
"백 번 지는 거야. 안 지려고 하면 계속 잘하게 될 수가 없어. 백 번 지고 나면 이길 수 있게 돼."
눈치 없는 민이는
"으앙 왜 형아만 알려줘?"
하며 옆에서 빵 울음을 터뜨렸다.
준이는
"어..어... 그래도...(잘 못하겠는데....)"
하더니 망설이다 일어나서 공을 향해 달려갔다. 아까 모두가 게임에서 나가서 뻘쭘하게 혼자 공 옆에 서 있던 형아도 다시 공을 차며 뛰었다.
형이 공을 조금 길게 찼고 준이가 그 공을 거뒀다. 정확히는 형이 공을 잘못 차서 달리고 있는 준이 앞으로 왔다. 하핫. 갑자기 표정이 활짝 펴지는 준이~ 뻥뻥 차며 달렸다. 좀 더 뛰다가 뒤따라오던 민이가 넘어져서
"힝 나 안 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하는 바람에 나는 민이 무릎을 만져주고 있었다.
(아.. 아이가 두 명이니 한 명에게 집중을 못 해ㅠ 두 집 살림 어떻게 하는 거야 대체)
쪼그려 앉아 민이 옷을 터는 내게 다가온 준이가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어.. 어...왜 저 형아는 나보다 큰데 내가 더 공 잘 찼어?"
"그랬어? 오 정말 그냥 하면 되나 보다. 다시 하면 이번엔 질 수도 있는데 또 해볼까?" 했다.
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형아의 아버지께서 형아의 공을 따로 가지고 나오신 모양이었다.
이 말은 못 했네.. 내일 해야지.
'준아 너 대단해..
나보다 낫다!
지기로 결심하고 두려움을 선택하다니!
나도 잘 못했는데 나도 해볼게'
준이 민이...
둘이 번갈아 코 골면서 잔다.
낮잠 건너뛰고 달밤에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그럴 만하다.
하루 종일은 아니라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아이의 눈을 보고
아이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다려 주는 것...!
그리고 남편과 소통하는 것!
그것이 중요함을 또 배웠다.
더 지켜보고 아이가 원하는 도움을 찾아보고 싶다.
저 정상참작 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