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11
2월 14일이 온다.
며칠 전 아침 아이 어린이집 채팅창에 올라온 대화를 읽고 웃음이 났다. 엄마들의 대화가 귀엽고 발랄했다.
‘삐00 초콜릿’이 밸런타인데이 한정판으로 나왔고
1차 예약이 정오에 열릴 것이며,
조금 비싸지만 초콜릿 맛이 예술이라 링크 공유한다는 글이 시작이었다.
이에 달리는 답변들이야말로 예술이었다.
- 음, 이런 링크는 아빠들 채팅방에 공유를…
- 밸런타인데이가 누구죠?
- 초콜릿 대신 현금으로 줘…
- 밸런타인데이가 문제가 아니라 맛있는 초콜릿은 사야 한다.
- 아직 남편 많이 사랑하는구나…
링크를 올린 엄마가 다급하게 톡을 했다.
- 삭제할게요… ㅋㅋㅋ
(남편이 아니라 아들이랑 같이 먹으려고 했다는 깨알 후문과 함께)
이게 바로 일상의 예술. 웃음으로 눈물 닦기.
그 해학미 아닌가…
정오가 지나고 결과는 참패.
10초 만에 품절이라 모두 사지 못했다는 이야기.
킬킬 웃던 나는 오래전부터 자문해왔으나 답은 찾지 못한 질문을 또 떠올렸다.
“가만있자… 밸런타인데이가 주는 날인가, 받는 날인가…”
질문과 함께 초콜릿은 나를 10년 전 기억으로 데려다 놓았다.
1. 그때 그 남편은 사라졌다.
2011년 남편과 내가 결혼한 해.
나는 초콜릿을 증말 좋아한다. 사탕, 젤리 따위와 비교 엄금이다. 그런 가벼운 맛과는 진하기가 다르다.
깊고 중후한 달콤함이 나에게는 대단히 치명적이다.
그걸 아는 남편은 결혼 후 14일이면 2월 3월 모두 나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남편이 쥐여준 수제를 비롯한 다양한 초콜릿 중 갤러 초콜릿은 잊을 수가 없다. 파스텔처럼 생긴 초콜릿이 색색으로 자기 자리에 담겨 있었는데, 저마다 각자의 색에 꼭 어울리는 맛을 냈다.
매년 자동 갱신되던 ‘초콜릿 제공 연간 회원권’은 정확히 첫째 준이가 내 뱃속으로 찾아온 2015년 2월에 끝났다.
디 엔드!
종료!
땡~~
끝
Fin.
2. 그때의 남편은 남아 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이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다.
당신의 죽음 뒤에도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말이 깊은 여운을 주었다.
내가 죽으면 그와 동시에 나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날은 남은 이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고, 내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삶도 하루도 그렇다.
잠듦과 동시에 '어제의 나'는 죽고 없다.
하지만 '오늘의 나' 안에는 어제까지 내가 산 날이 들어있다.
어제의 나는 아니지만, 그 기억을 품은 오늘의 내가 새로이 살아가는 것이다.
2011년의 남편과 나는 사라졌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나눈 미소와 눈빛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초콜릿의 달콤함은 오늘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따뜻함과 고마움을 내 안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울 수도 없고 결코 사라지지도 않는
'남편과 내가 살았던 날들'
3. 남편과 살아갈 날들
남편과 둘만 살게 될 20년 뒤가 궁금해진다.
아이들이 자라서 각자 독립을 하고 남편과 빈 둥지에 둘만 있게 된다면? 어색하고 낯설다. 아이들을 뺀다면 공통의 관심사도 새롭게 나누고 찾아보게 되겠지?
두 낯선 남녀가 황혼의 선이라도 보는 심정일 듯하다.
그때의 우리는 지금 쌓아가는 하루하루를 자양분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상대가 내가 모르는 전투를 하고 있을 수 있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다.
나는 남편이 어떻게 매일을 살아 내고 있는지 세세히 알지 못한다. 남편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변화 중일 것이다. 어제의 남편이 오늘의 남편이 아니고 오늘의 남편이 내일의 남편이 아닐 수 있다. 어제의 남편은 어제로 보내주고, 어제의 나도 어제로 보내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도 오늘 새로운 경험을 했고 어제와는 다른 생각도 하면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오래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잘 안 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매일 새로운 남편과 만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어제의 그 사람'은 '오늘의 이 사람'에게 영향은 미쳤지만, 지금은 가고 없다고 말이다. 매일 어제의 내가 죽고 오늘의 내가 아침에 새로 태어나듯이, 나는 어제의 남편은 고이 보내주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남편을 만나는 거다.
우리는 부부다. 서로가 '살았던 날들'을 쌓아갈 때 지켜봐 주고,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행하는 것, 그게 우리가 같이 사는 이유겠지?
나무는 들판의 기억을 품은 과실을 맺는다고 했다.
나는 사랑의 기억을 품은 과실을 맺어나갈 것이다.
여보... 당신이 주었던 초콜릿 고마웠어.
초콜릿 하나 사달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