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12
큰 아이 준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2022년 남편과 나는 학부모가 되었다. 자식이 무려 초등핵교를 다니는 핵생! 감개무량하다.
졸업을 기념하면서 몇몇 가족이 각자 방을 얻어 졸업을 기념하는 여행을 했다.
신나는 게임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키즈 카페도 있어 아이들이 즐거웠고, 아이들이 즐거우니 나도 더 즐거웠다. 무엇보다 아이 네 살 때부터 찐하게 함께 한 부모들과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순간순간 뭉클한 이별 여행처럼 느껴졌다.
남편과의 여행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족끼리 식사를 했기 때문에 뷔페에 앉아서 서로의 음식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도 좋았다. 남편은 새콤하고 깔끔한 '해파리냉채'가 마음에 든다며 해파리만 두 마리는 가져다 먹는 거 같았다. 아이들만 뭐 좋아하는지, 뭐 먹일지 많이 고민하던 시간의 연속선 위에 남편의 해파리냉채가 콕 다른 색의 점을 찍는 느낌이랄까? 마음이 좋았다. 남편도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나의 부탁들에도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내가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방에 올라가 있을 때에도 남편은 흔쾌히 아이 둘과 게임장에서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부탁이 미안하지 않고 요청이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좋은 팀, 잘 맞는 파트너처럼 느껴졌다.
아침을 먹고 수영장으로 입수!
아들 둘이라 참 좋으면서도 미안한 일은 알몸으로 통과하는 곳을 가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크면서 다른 성이라는 이유로 두 아이의 세신과 환복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영장에서 나간 뒤 남편에게 감사를 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수영 시간은 수영장 안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가면서 이어졌고, 저녁식사 때가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튜브와 함께 동동 떠서 몸을 가눌 줄 알게 된 다섯 살 민이의 몸놀림은 너무나 귀여웠고, 아쿠아슈즈를 신고 나서야 딱 미끄럼틀을 탈 수 있는 키가 되어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는 여덟 살 준이의 미소는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아무튼 긴 물놀이 끝에 으른들은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몰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거 같지는 않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수영 놀이도 폐장시간이 되자 끝이 났다. 나는 남편보다 3배속으로 먼저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아 남자 셋을 기다렸다. 이때 한 엄마 J가 씻기를 마쳤는지 나왔다. 그 엄마는 이번 졸업 여행에 공교롭게도 남편이 일을 있어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오게 되었다. 준이와 민이는 도착한 첫날은 게임장에서 가볍게 놀았는데 어제부터 이어진 수영에 아이 둘을 돌보던 J는 많이 지쳐 보였다. 졸업 여행 오기 전에도 근 몇 달을 남편 없이 지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기에 너무 걱정이 되었다. 손에 든 젖은 짐이 엄청 무거워 보였다. 게다가 J는 어지럽다고 했다. 나는 얼른 그 J의 손에서 짐을 빼들었다. 그때 남편이 나왔다.
나: 여보, 나 J가 어지럽다고 해서 짐 옮겨주려고. 먼저 올라가 있어.
남편: 응, 여보.
J 가족은 오늘 퇴실하는 일정이라 이미 체크아웃을 한 뒤였다.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주고 난 뒤 좀 쉬었다가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함께 객실로 올라갔다. J는 침대에 누웠고 나는 J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를 원했다. 운전하고 가려면 힘들 테니까. 그래서 J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임장이든 어디든 한 바퀴 돌고 오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배고프지 않은지 아이들에게 물으니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남편: 여보 여기 로비 앞 커피숍이야. 잠깐 내려와. 내가 커피 한잔 사줄게. 여기 뷰도 좋다. 아이들이랑 잠깐 쉬었다가 올라가자."
나: 아... 아... 응 여보... 아 근데 여기 J네 아이들이랑 함께 가도 될까?
남편: 여보 근데 방에서 여보 여태껏 일했잖아. 일부러 여보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부른 건데..
나: 알았어. 그럼 잠깐 내려갈게...
나는 남편의 욕구와 나의 욕구가 같다고 느껴졌다. 내가 J에게 휴식을 주고 싶듯이 남편도 나에게 휴식을 주고 싶은 거라 생각했다. 그 마음이 소중했고 고마웠다. 혼자 아이들 챙기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런 로맨틱한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뭉클했다. 내려가서 차 한 잔 받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과연 남편 말대로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멋졌다. 아이들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남편은 나를 위한 따뜻한 밀크티를 준비했다 내밀었다. 그때 일을 적고 있는 지금도 가슴 한편이 애틋하다.
나: 우와. 진짜 여기 좋네? 고마워, 여보.
남편: 여보 우리 저녁은 애들이랑 치킨집 가서 치킨 먹자.
나: 아... 여보 그럼 ㅇㅇ이랑 ㅁㅁ이도 같이 먹으면 안 될까? 아까 ㅇㅇ이도 치킨 먹고 싶다고 했거든.
ㅇㅇ이와 ㅁㅁ이는 J의 귀엽고 순수한 아이들이다.
남편: 아, 여보~ 그런데 나는 우리 가족이 이런 시간 어렵게 가진 거라서 좀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 아니면 치킨을 시켜서 위로 보내주자. 그러면 되잖아. 오붓하게 보내자.
나: 응 여보. 그렇게 우리끼리 오붓하게 보내면 좋은데.. 어떡하지? 여보...J가 어지러워서 쉬고 있고 아이들도 배고픈 거 같아. 아마 J도 내가 어지러우면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주었을 거야. 준이 민이 어릴 때 도움도 많이 받았고, 당장 여보 없을 때는 내가 많이 도움받았어. 엄마들끼리는 다들 흔쾌히 해줄 거야.
내가 남편이라면 정말 화가 났을 거 같다. 그 화는 좌절과 답답함이었을 것이다. 서운함이나 소외감일 수도 있고. 지금 돌이켜보니 남편의 욕구에 대한 방법은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차분하게 이어갔다.
남편: 여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겠어. 그러면 치킨을 사서 올려 보내자. 그 객실에 S도 있잖아. 여유롭게 여보랑 이야기하고 싶어.
알았다고 말하고 나는 S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가족은 밑에서 치킨을 먹을 거라 J 아이들이 원하면 치킨을 사서 올려 보내줄까 하고 물었다. 이때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거 같다. 아까 객실에서 내가 말한 산책의 연장선 상에서 S는 J가 치킨 생각 없다고 하니 아이들을 내려보내겠다고 했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본 남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여보 미안한데 아이들 내려온다고 해.
남편: 알았어. 같이 먹지, 뭐.
나는 남편에게 흔쾌한 예스만 해달라고 해놓고서 강요하고 있었다. 미안했다. 웃겼다, 나 스스로가. 여러 가족이 있었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았고, 내 사정을 이야기한다고 비난할 사람도 없었다. J 역시 이런 상황을 들었다면 충분히 다른 방법을 낼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여하고 싶다는 욕구 앞에서 '내가 아이들을 돌봐줘서 나의 도움으로 J를 쉬게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수단만을 붙잡고 있었다.
부탁과 강요를 구분하고, 욕구와 수단을 구분하는 것.
욕구는 꼭 붙잡고 놓지 않되 수단은 가볍게 쥐고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책에서 읽을 때는 잘도 이해되던 것인데.
남편에게는 부탁이 아닌 강요를 했고,
나 스스로에게는 욕구와 수단을 동일시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진심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 '당신 어떤 마음에서 그러는 건지 다 아니까 마음 편하게 맛있게 먹으라'고도 했다. 나는 그때는 정확하지 않았던 불편함을 글을 적으면서 많이 발굴해내고 있다.
우리는 치킨 두 마리와 치즈볼을 시켰고 남편의 이해 덕분에 나는 기분 좋게 네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와 남편은 준이와 민이를 먹이느라 바빴고, 특히나 민이는 프라이드 양념의 후추 맛이 매운지 잘 먹지를 못해서 씻어 먹였다. 그러다 안 돼서 밖에 나가서 누룽지를 사다가 양해를 구하고 먹였다. 우리는 바쁜 가운데 속도가 느렸지만 ㅇㅇ와 ㅁㅁ는 배부르다며 치킨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나가서 게임장을 구경하겠다고 했다. 나는 밥을 먹이다가 아이들에게 나가 보았다. 큰 아이 ㅇㅇ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내려온다고 했단다. 잠시 후 J가 내려와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돌아왔다.
여보. 당신이 자기가 원하는 거 잘 표현하는 사람도 아닌데, 저렇게 표현해준 기회를 흔쾌히 들어주지 못해서 내 마음이 슬퍼. 미안해.
그리고 언제인가 나에게 그랬잖아.
"비폭력대화 혼자 공부해, 나는 그거 공부 안 해"
라고 말했던 당신이.. 나보다 '상대 안에 살아있는 아름다운 욕구'를 더 잘 본 거 같아.
서운했을 텐데 나의 선의를 알아주고 도와주려고 해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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