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酒, 술독에 갇힌 직장인들

회식자리, 건배사가 싫다면, 지금부터라도 탁월한 코너링 실력을 키워보자.

by Ohms

회식은 회사생활의 꽃이다. 날이 좋아서 한 잔, 날이 좋지 않아서 한 잔, 날이 적당해서 또 한 잔, 회식 통보는 매번 징조도 기척도 없이 다가와 내 멘탈과 간을 마구 흔들고 헤집어 놓는다.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건강까지 버리는 백해무익 그 자체이지만 오늘도 그들은 늦은 새벽까지 ‘가족아이가!!’를 외친다. 물론, 내일도 출근이다.


‘회식, 그까이꺼 가기 싫으면 대충 젖히고, 안 가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내 발길은 회식 장소로 향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회식은 술로서 단합을 다지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회식자리는 심한 경우 사내 패거리 문화 확산의 성지가 되기도 한다. 회식을 빠진 다음 날이면, 회식자들 간에 뭔지 모를 끈끈한 기운이 감돌며 불참자를 원인 모를 불안감에 빠지게 한다. 그렇게, 나를 제외하고 회식에 참여한 사람들 간의 단합력은 +1 상승한다.


그렇게, 연말연시 인사고과 시기가 도래하면 차곡차곡 마일리지를 쌓은 이들은 좋은 경품(?)을 받게 되고, 그 때에 느꼈던 불안감은 이내 확신으로 굳어진다. I should have 회식참여ed... 회식 is 뭔들... 아놔...





같은 층에 근무하는 동기는 오늘도 분주하다. 늦은 오후까지 한참 동안을 숨도 안쉬고 구글링에 몰두하며 자료를 찾고, 표를 그리고, 숫자와 이미지 붙여넣기를 반복하더니만 갑자기 내 자리로 슬쩍 다가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옴스, 이 주변에 회식할만한 데 아는데 있어?" 그랬다. 이 친구는 오늘 저녁에 있을 회식을 위해 몇 시간 째 회식 장소 물색을 반복하고 있었고, 후보지로 선정한 주점들의 주요메뉴, 이동거리, 예산 등을 산출해서 비교하는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부사장 내지는 전무라도 참석하는 회식인가 물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냥 자기네 부서장인 부장이 주재하는 회식이었다. OMG..


그 날 저녁, 회사 근처에서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동기를 목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알고보니, 최종 회식장소 선택된 곳에 가보니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부장 및 이하 중간 실무자들이 역정을 내어 방이 있는 술집을 찾아 미친듯이 주변 지역을 뛰어다녔다는 후문이다. 한국어를 제외한 2개국어로 프리타킹이 가능한 동기였지만, 그 놈의 회식이 뭐라고 꼼꼼하지 못하고, 어리바리한 놈으로 낙인찍혀 발에 땀띠 나도록 두 발로 뛰어 다녀야했다. 영업사원에게 탁월한 시장분석 능력과 숫자에 대한 감각,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나보다.




세계 초일류를 부르짖는 한국기업들 답게, 대한민국 기업들의 회식자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한 번의 회식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그래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건배사 세리머니다. 마음 속에 있는 울분을 그대로 표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방으로 좌천을 당할 것이 자명하여, 영혼은 잠시 밖으로 출타시키고, 입술에는 침을 흥건히 묻힌 뒤 마음에도 없는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멘트의 완급조절과 적절한 추임새, 진심이 느껴질 듯한 표정연기를 곁들이며 영혼-less 건배사를 무사히 끝내고, 마무리는 아재감성에 맞춰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3창을, 마지막에는 스타카토를 반드시 넣어 달라고 싹싹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제안한다. 흡족한 표정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온다. 업무를 할 때도 받아본 적 없는 열화와 같은 성원이다.


한 번이면 족할 줄 알았던 건배사는 매 술자리마다 이어진다. 퍽 난감하다. 스페셜 세리머니인 줄 알았던 건배사는 매 술자리의 디폴트 이벤트였고, 한 번 시작된 건배사는 한 바퀴를 돌아 모든 참석자가 한 번의 건배사와 한 잔의 술을 마칠 때까지 이어진다. '분명 어제도 했는데...' 어제는 송년사, 오늘은 신년사, 내일은 과장님의 결혼 축하, 모레는 이사님 아들의 대입을 축하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술자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건배사에 질려 버릴 지경이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입에 침을 바르고, 영혼을 잠시 출타시킨다. 월급날이 얼마나 남았더라...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건배사'를 넣고 엔터를 친다. 실소가 터져 나온다. 수많은 건배사 관련 책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회식 자리로 인해 느끼는 부담과 답답함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모습이다. 건배사도 책을 보고 익혀서 준비해야 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지지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회식을 앞두고 있을 어떤 짬찌들은 지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입사 후에는 내가 속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 내지는 유능한 관리자가 되기 위한 꿈을 키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도 현실 속 직장인들은 '회식하기 좋은 곳', '건배사 잘하는 법', '소맥 맛있게 타는 법'을 찾고 있다. 같은 지구촌에 살고 있지만 오로지 능력으로만 평가받고, 실력 있고 유능한 사람이 리더가 된다는 이야기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다. 酒력사회 한국이 能력사회로 바뀌는 것보다 엘론 머스크의 우주정복이라는 야심찬 꿈이 먼저 이뤄질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회식에 빠지지 않는 사람, 술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기가막힌 코너링 실력만으로도 꽃보직에 차출되어 갈 수 있는 한국사회가 아니던가. 기가막힌 코너링 실력이 없는 나는, 오늘도 영혼을 잠시 가출시키고, 입에 침을 바르며 담담히 건배사를 준비한다.



O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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