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입맛에 맞는지 수시로 확인하자. 헬조선에서는 요령이 곧 실력이다.
지난 번에 작성했던 헬조선에서 인정 받는 신입사원되기 업무편 2탄이다. 대단한 내용은 없다. 헬조선이기 때문에게 가능한, 그리고 헬조선 신입사원들의 스트레스 감소와 빠른 헬조선 문화 적응을 위한 쓸데 없는 요령들을 공유한다.
4. 고객님의 주문내역을 수시로 확인하자.
맞춤정장을 주문하고 작업이 중간 정도 진행되면 가봉을 진행한다.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기 전 곳곳에 날카로운 핀이 박힌 거적때기를 걸치고 주문자의 체형에 맞게 옷의 틀이 잘 잡혔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처음 옷을 주문할 때 애매했던 부분들을 바로 잡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가봉이 필요하다. 보고서를 주문하신 고객님의 처음 의도에 맞게, 취향에 맞게 틀이 잡혔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대부분의 고객님들은 보고서를 주문할 때 이미 머리 속에 그려놓은 보고서의 이미지가 이미 존재한다. 또한, 처음 주문할 때의 의도와 생각과는 달리 더 높으신 VIP고객님의 말 한 마디에 따라 그 보고서의 방향과 의도는 호떡 뒤집히듯이 뒤집히는 경우도 다반사다.
고객님의 요청과 변심을 눈치 채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역정 뿐이다. 몇 날 몇 일을 고생했는지는 상관 없다. 그저 자신이 요청한 결과물이 제대로 나왔는지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 중에 수시로 작업 중인 보고서를 들고 찾아가 보고서가 고객님의 요청대로 작성되고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VIP고객님을 만나고 돌아온 뒤에는 특히 귀를 더 쫑긋 세워야 한다. 판 자체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는 내 것이 아니라 고객님의 것이다. 고객님의 취향과 입맛에 맞게 수시로 중간결과물의 확인을 요청하고 확인 받자.
5. 정보를 수집해라. 새로울 일은 없다. 꼼꼼한 정보수집과 짜집기가 핵심.
신입사원 업무를 본질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일 대부분이 특별할 일 없이 반복된다'라는 팩트에 도달한다. 앞서 첫 번째 원칙으로 전체 업무 프로세스와 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여기서는 세부적으로 어떻게 반복적인 업무에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되겠다.
아시다시피 필자는 해외경험 없이 해외영업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부서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이메일의 80% 이상이 영어로 교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의 이름이 아닌 담당 프로젝트의 중간관리자의 이름으로 교신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담이 더 컸다. 오죽 부담스러우면 사수가 자리로 돌아올 때면 행여 내게 이메일 작성을 시킬까 싶어 황급히 자리를 뜨며 화장실로 향했던 적도 많다. 필자에게 필요한 것은 재빠른 눈치와 요령이었다.
업무지시를 받으면 기존에 상사, 선배, 사수가 작성했던 보고서, 발송했던 이메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Reference is made to the email received on 3rd of March'
'We would appreicate it if you can provide more detail information..'
'Once we finalize internal discussion regarding this matter, we will revert to you shortly'
등등 상당히 관용적이면서 격식을 갖춘 표현들이 차고 넘쳤다.
굳이 '비즈니스 영어 이메일 작성법',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보고서 작성법' 따위와 같은 책은 읽을 필요도 없다. 외려 현업과 더 동떨어진 내용들만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신입의 고객님들인, 아재 성님들의 입맛에도 맞지 않는다. 입찰서류를 접수했을 때, 입찰을 거절할 때, 협력을 제안할 때, 견적을 제출할 때, 미팅을 제안할 때, 의전 프로세스를 협의할 때 등등 각 상황마다 필요한 모든 틀과 관용구는 모두 기존에 진행됐던 업무들 속에 있다.
대부분의 신입사원은 입사와 동시에 묵언수행을 시작한다. 열심히 회의에 참석도 하고, 의견도 개진해 보고 싶지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주어지는 소임이 있다. 잡일이다. 내가 알바로 취직을 한건지 정규직인지 원인 모를 정체감의 혼란을 겪는 순간이다. 출력, 복사, 스캔 3종 세트부터 회의실 세팅, 정리, 그리고 회식장소 예약까지. 물론 업무적으로도 실력도 쌓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헬조선은 무던하게 일만 잘하는 곰보다 별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 것처럼 연기하는 여우가 더 인정 받는 곳이다. 어차피 다녀야 할 회사라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이왕이면 요령 있게 시작해서 사뿐히 연착륙하기를 바란다.
Oh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