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주 하는 질문이지만 글쎄, 아직도 아는 건 별로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다만 하나 확실한 건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거다. 살다 보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내 생각이라고 여겨왔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었던 것들을 마주하는 경험.
"너는 일에 책임감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넌 보기보다 남들을 잘 챙기더라."
"자기 생각이 확고한 편인 것 같아."
일상 속에서 한 번 두 번 듣게 되는 말들. 그게 듣기 좋았든 싫었든 간에 그중에 자주 들은 말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은연중에 점점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도 갖게 된다.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져도 내가 직접 경험해오던 '나'라는 캐릭터에 타인이 바라보는 시각을 더했으니 나름 객관적이라 생각하며 넘겨버리기도 쉽다. 속으로 '나는 책임감 있고, 남들을 꽤 챙기면서,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야.'라고 정의 내리면서.
이렇게 정의 내려온 나에 대한 문장들은 실제의 나를 나타내는 문장이 될 수 있을까?
책임감이 있는 사람
꾸준히 자기 발전에 관심을 갖고 학구적인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아는 게 많은 사람
...
책임감보단 성취욕이 강한 사람
간헐적으로 자기 발전에 욕심이 생기는 사람
꿈은 없고 꿈보다도 당장의 재미가 중요한 사람
아는 건 없지만 아는 체하고 싶은 사람
...
남들이 말해주던 '생각 속의 나'와 '실제 속의 나'는 괴리가 있다. 일단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으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 부정하고 기억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애초에 객관성이 떨어진다. 또한 '생각 속의 나'에는 큰 맹점이 있는데 남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보단 꾸며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는 점이다. 특히 대학 시절에는 '이렇게 행동하는 게 더 좋게 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고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쪽으로 행동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나를 봤는지에 따라서도 캐릭터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친누나'가 '집'에서 본 '게임하는 나'와 '대학 후배'가 '대학교 동아리방'에서 본 '시험공부하는 나'는 상상되는 이미지부터 크게 다르지 않은가. 특정 상황을 반복해서 목격한 사람이 판단한 나는 만들어진 캐릭터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생각과 실제 속의 나 사이의 괴리가 클 수밖에.
무엇보다 위와 같은 문장은 사실 의미가 없다. 정확히는 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행위 자체가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꾸준히 묻는 건 필요한 일이다. 다만 이런 물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앎 자체이지 정의가 아니다. '나에 대해 알아간다'와 '나를 정의한다'는 건 전혀 다르니까.
알아간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그때그때의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반면 정의한다는 건 위에서 말한 '생각 속의 나'나 '실제 속의 나'같은 걸 자기 나름대로 적어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해가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정의를 내려버리면 여러 문제점이 생긴다. 일단 나를 그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최대한 맞춰보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나' 자신보다 각각의 사건에 의미를 더 두거나 역할에 매몰되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 갈지는 예측만 해볼 뿐이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거의 나의 행적을 보면서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복잡한 인간에 대해 제대로 정의를 내릴 수나 있을까? 비슷한 상황이라도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나의 감정은 극과 극일 수 있고,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하던 사람도 다른 상황에 처하면 글 쓰는 행위가 싫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일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포기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지난 나를 찾는 여행이란 글(https://brunch.co.kr/@ohmung/31)에서 위의 두 문장을 예시로 들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게 좋겠다고 적었었다. 그 당시에는 좋아하는 일 자체를 찾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적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두 문장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꼭 일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내가 행복한 것들을 꾸준히 이어 가라고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좋은 '보편적인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 말고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아닐까 싶다. 꺼려지는 마음을 피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정 말이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에 대해 온전히 알 길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기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에 솔직할 수 있고, 변화하는데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잠도 자지 않고 게임을 24시간 하고 끝장을 보고 싶은 것, 지금 이 글을 적다가도 다른 주제로 적고 싶은 것, 치킨은 맛난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별로라 피자가 먹고 싶은 것, 지난번엔 그랬지만 이번에는 이러고 싶은 것, ..., 이런저런 '싶은 것'들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온 몸으로 느껴가더라도 상관없다.
그게 남들이 생각하기에 썩 좋거나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니더라도 눈치 보지 말고, 내가 좋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괜찮으니까. 그게 남들과 다르더라도 나를 알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