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숲책방 일기
가끔 아이들끼리 책방을 구경하러 올 때가 있다. 책방의 왼쪽으로는 키즈카페, 오른쪽으로는 아동복 매장이 있어 아이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도 많이 들려온다. 어제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녕하세요!” 하고 낭랑하게 외치며 혼자 걸어들어오더니 곧장 카운터 옆으로 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혹시 신발 못 보셨어요?”
작은 체구에 비해 하는 말이 야무졌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약간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어른답게 침착하게 대답했다.
“글쎄, 못 봤는데요. 이 근처에서 신발 잃어버렸어요?”
“아니요~ 그냥 있나 해서 와봤어요.”
나는 아이가 질문한 의도도 책방에 들어온 이유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이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그러고는 가게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이내 그네 의자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우와,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아이는 그네 의자에 뛰어들었다. 그네 의자는 아이가 타기에 높이가 약간 높아서 의자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내가 잡아줘야 했다. 후다닥 가서 잡아주었는데, 아이는 의자에 앉는 대신 쿠션에 엎드려서 말했다.
“저 이러고 잘 수 있어요!”
아이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하였다. ‘아 그렇구나…여기는 자는 곳이 아닌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벙쪄 있는 나는 아랑곳 않고, 아이는 ‘와 편하다’ 하며 자신의 시간을 즐겼다. 그 아이를 보며 나는 잠깐 생각했다. 엄마를 잃어버린 거면 어쩌지, 보호자가 없을까? 물어봐야 하나? 잘 수도 있다던 그 아이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 시간은 의외로 오래가지 않았다. 3분도 되지 않아 아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활기차게 말했다.
“저 그럼 이제 가볼게요!”
그러고는 아이는 뛰어나가며 외쳤다. ‘엄마~’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들 세 명이 와서 꽤 진지하게 책 얘기를 하며 책방을 둘러보고 갔다. ‘이 책 재밌는데’, ‘나 이 책 알아!’, ‘지구 끝의 온실 짱 재밌는데! 너 이거 꼭 읽어봐!’ (나는 여기서 그 아이들 틈에 섞여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책 누구(친구 이름) 선물해 줘야겠다!’, 책을 안 읽어서 문제라는 ‘요즘 애들’ 답지 않게 세 명의 아이들은 문학 작품을 꽤 많이 읽어본 듯했다. 역시 아무리 독서인구가 줄어들더라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늘 존재한다. 아이들 중 한 명은 내 최애 웹툰인 ‘아홉수 우리들’ 과 최애 드라마 ‘그해 여름은’ 각본집을 발견하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사실 그 책들은 누가 살 것을 기대한 건 아니고 오로지 내가 좋아해서 들여놓고 책꽂이 맨 위 칸에 꽂아둔 것이라 손님 백 명 중 한 명꼴로 그 책들을 발견하고 언급하곤 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아 눈높이가 낮은 아이들이 그 책을 발견했다는 건 꼼꼼히 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아이들은 책을 살 듯 말 듯 , 진지하게 고민하며 둘러보다가 결국 구매는 하지 않고 ‘다음에 또 올게요!’ 하며 나갔지만 그 아이들 덕분에 나는 어쩐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책방 주인으로서 아이들을 맞이할 때면 자주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까지 세탁소를 운영해오고 계신다. 그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꽤 많은 시간을 세탁소 안에서 보냈으며, 가게 안이 지겨워질 때면 세탁소 뒤의 놀이터에서, 아니면 세탁소 인근의 상가들을 들락거리곤 했다. 그 가게들 중 특히나 문구점과 책 대여점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문구점에 있는 색색깔의 펜과 아기자기한 스티커와 수첩, 노트들을 구경하는 게 늘 재미있었다. 문구점에 자주 혼자 가서 한 시간씩 있다 오곤 했다. 문구점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지나다닐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은 가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작은 가게에서 하염없이 왔다 갔다 하며 꼬물거리던 나를 보고 문구점 사장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장님은 내가 근처의 세탁소집 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나에게 한 번도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하신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가 안전하게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신 거다.
내가 자주 방문하던 또 다른 가게, 책 대여점에서는 문구점에서 오래 구경만 하고 돈을 거의 쓰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게 더 쉽게 돈을 썼다. 여기서 처음 ‘드래곤 볼’ 만화책을 빌려보고 일본 만화라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만화책 한 권을 빌리는 게 300원이던 시절, 나는 늘 부모님께 천 원을 달라고 하여 하루에 세 권씩 빌려읽었다. 나는 사랑과 로맨스를 그린 순정만화보다는 ‘소년만화’라고 불리는 모험심을 자극하는 장르를 좋아했다. 소년만화 속 여성 캐릭터는 대체로 조연이었고, 미녀였고, 너무 성적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게 불편한 줄도 모르고 주인공인 ‘소년’의 마음에 나를 이입하여 만화 속 세상을 즐겼다. 시대를 풍미했던 ‘해리 포터’도 모두 그 책 대여점에서 빌려읽었다. (때문에 우리 집에는 해리포터 책이 없었는데, 작년에 개정 출판된 시리즈의 전권을 샀다.) 그 시절 내게 문구점과 책 대여점은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해준 또 다른 친구이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늘 가득 찬 세계였다. 그때 형성된 취향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대입하여 책방을 방문하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본다. 내게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주었던 그 문구점과 책 대여점처럼, 내 책방에서 어떤 아이들이 취향을 형성해나갈 수 있다면, 내 가게가 누군가의 인생에 그런 의미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그래서 책방에 온 아이들이 이곳을 좋아해 주는 티를 내주면 책이 한꺼번에 다섯 권쯤 팔린 것처럼 신이 난다. 비록 그 아이들이 아무것도 사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책을 고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내 마음 속에서 그의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과학 책을 집어보는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 동시집을 좋아하는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 책방에서의 모습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는 건 그 아이의 극히 일부이지만, 내 책방이 그들의 소중한 취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