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신당역 살인사건의 피해자 분을 추모하며
또 화장실이다. 2016년 강남역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과 2022년 신당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분명 다르지만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 환멸나고, 마음이 너무나 갑갑하다. 모든 게 그대로인 게 화가 난다. 가해자가 남자인 점, 피해자가 여성인 점. 그 여성은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이거나 지하철역 인근 ‘화장실’이 범죄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 이 사건이 ‘여성 혐오’ 범죄냐 아니냐, 또 논란이 된다는 점. 누군가는 이 사건이 여성 혐오와는 상관이 없다고, 또 그렇게 말한다는 점.
여성이 남성에게 폭행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잦다면 잦은 일이었다. ‘여성 혐오’라는 말이 흔히 쓰이기 이전부터 여성들은 늘 조심해왔다. 서로의 밤길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때로는 스스로가 불안해서 한적한 거리를 마음 놓고 걸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빠른 길이더라도 큰길로 돌아가야 했다. 외부에 있는 화장실을 갈 때면 혼자 가서는 안됐다. 화장실 칸 문을 잠그고 나서는 좌우 앞뒤 위아래를 살핀 뒤에야 용변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여자들이 조심하며 사는 일상이 당연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 화장실에는 ‘몰래카메라’(불법 촬영) 예방법이랍시고 귀여운 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몰래카메라 구별법, 현장에서 촬영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대처법.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합시다.’
대학을 다닐 시절에 우리 학교에서 불법 촬영범이 현장에서 검거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그즈음에 악몽을 자주 꿨다. 나는 화장실에 있었고 어떤 눈이 문틈 사이로 지켜보고 있는 악몽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숨이 막혀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꿈속에서도 나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조차 ‘적절히 대처’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다음에는 이런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후추 스프레이를 한동안 집에 갈 때 손에 꼭 쥐고 다녔다. 그렇게 ‘대처’했기 때문에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은 건 결코 아닐 것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조심하라는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런 일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여성 혐오 범죄는 늘 있어왔는데, 그 전에는 그저 살인 사건이던 것에 왜 굳이 ‘여성 혐오’라는 말을 붙이냐 이 말이다. 여성들은 그저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조심해봤자 소용없지 않느냐. 이게 우리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사건들이냐고. 그리고 남자들은 이토록 조심하면서 살아본 적이 있긴 하냐고. 애초에 여성이 조심해야 하는 현실 자체를 바꿔달라고.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안전에 위협을 느낀다면 그게 바로 ‘여성 혐오’ 범죄이기 때문이라고. 여성이 소리 지르고, 도망치고, SOS 벨을 누르고 그렇게 하는 게 뭐가 사건을 예방하는 거냐고. 조심하는 게 이런 거라면, 조심하는 건 나쁜 거다. 살인 사건을 예방하는 데에 하등 쓸모가 없으니까.
그동안 여성이 살해당했던 수많은 사건들보다도 이 사건에 많은 여성들이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그것이 유독 ‘번화가’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신당역 사건에서 피해자는 더구나 직장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러한 사실 때문에 여성들은 피해자와 자신의 일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더라면 ‘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정이 너무도 내 일상과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그 시간에 강남역을, 신당역을 지나가는 게 특이한 일이 아니었고, 그곳에 있는 게 보통은 위험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여성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안전하다고 생각해왔던 시간과 장소를 또 한 번 지워야 했다. 사람이 많은 곳, 회사 내 근무시간, 지하철 역, 성별 분리 화장실. 모두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느끼게 됐다는 점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흔치 않은 일(흔하다, 흔치 않다는 주관적 느낌에 따라 달라질 수있다)이라 치자, 그래. 이런 사건은 간혹(? 흔하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다) 발생한다고 얘기하고 싶겠지. 그러나 정말로 간혹 일어날 수 있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인사건이라고 해도, 그 폭력은 늘 ‘불특정 다수 여성’ 에게 향해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자문해보면, 자꾸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피해자가 남자였다면?’
남자였다면, 업무 시간에 혼자 있는 틈을 타 기습할 생각을 하기라도 했을까? 상대방에게 느꼈던 어떤 분노가 살해하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아니, 분노를 느끼기는 했을까? 상대가 남자였다면, ‘감히 네가 나를 신고해?’ 따위의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여성이라서 죽었다’는 말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조차도 질리지만,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여성이라서 죽는 일이 없었으면 하니까. 가해자는 너무나 명백하게도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억하심정을 품었고, 여성이라서 폭력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해자가 이번 살인사건 이전의 스토킹 범죄에 대해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그는 국민감정이 누그러질 때까지 판결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언론의 영향 때문에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해 형이 무겁게 내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언론이고 나발이고,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와 유족들의 감정만 생각해도 그 죗값은 무겁게 받아야만 할 것이다. 부디 가해자에게 남은 마땅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한 여성의 목숨보다 한 남성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판결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그분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