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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Nov 03. 2022

'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

2022년 10월 29일의 참사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명확한 글자로 정리하여 내어놓는 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 억울한 일, 화가 나는 일이 생겼을 때 더욱 긴 일기를 썼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은 물론 일기와는 다르다. 내가 쓰고자 하는 그 일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거르고 걸러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정리하여 풀어내야하기 때문이다. 그저 욕을 내뱉는 것만으로, '화가 나고 슬프다'라고 쓰는 것만으로,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글자들을 타이핑 하는 것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욱 쓰고 싶었다. 정리가 안 되는 그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쓰는 글이 희생자들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말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악의적인 말들이 쉽게 내뱉어지고 떠돌아다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글들은 상대적으로 어렵게 쓰여지고 전파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글에 큰 파급력은 없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조금의 파급력이라도 있어서 누군가가 악의적인 글을 볼 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생각을 쓰고자 한다. 다만 기사에 나온 그 어떤 사실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며, 묘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일에 대해 어떤 글도, 생각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란다.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극도로 싫어해서 지금껏 클럽을 가본 적도 없고,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콕 박혀있는 성격이었고, 굳이 나서서 연말모임을 잡는 편도 아니었고, 할로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번화가에 가 본적도 없었다. 어떤 정치적 집회에 참석한 적도 없다. 내가 얌전해서, 건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조용함과 한적함을 남들보다 더 좋아하고, 소란스러움과 북적임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건 그저 내 성향이고 취향일 뿐이다. 그게 올바른 건 아니다.


그런 내 성향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서 북적이는 거리를 피할 수 없었던 순간들은 많았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넘어진 기억이 두 번 있다. 급정거를 하는 순간 내 옆에 왼쪽에 서있던 네 다섯명의 사람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내가 서있는 방향쪽으로 몸을 밀쳐왔고, 그 무게가 가장 크게 가중되는 곳, 가장 끝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는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손잡이를 놓치고 넘어졌다. 누군가의 발 위로 넘어졌지만 넘어진 나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나는 홀로 조용히 수치심을 느낀 채 조용히 일어났다. 내가 그 곳에 서있고 싶어서 서있던 것이 아니다. 우연히 내가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명동에 간 적도 있었다. 중학생 때,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 놀러갔을 때 사촌 언니가 명동 구경시켜준다고 같이가자 해서 가게 된 것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길거리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빼곡히 서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길에서 사람을 피하는 게 불가능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갈 수 없고, 사람들이 가는 방향에 휩쓸려서 떠밀리는 방향대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크리스마스에 어딘가에 나가는 걸 피하게 되었다.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면 그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치이던 순간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고 지치고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죽을 수도 있었다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할로윈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다고. 심리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한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에 의해 굴러가야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은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이다. 이러한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인과도 믿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할 근거를 잃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믿음이 늘 타당하고 옳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늘 합리적이고 타당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일로 죽을 수 있다. 그것도 순식간에. 이 사실을 직면하는 게 너무나 괴롭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사건을 맞딱뜨렸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이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였을 수도 있다' 혹은 '나와 가까운 누군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직면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안다. 하지만 그 일을 완전히 남의 일로만 여기지 않는 게 애도의 시작이 아닐까.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 일을 피하지 못했을 그들에 대해 생각한다. 우연히 그곳에 있게 된 그들을 생각한다.


그래야 그 후의 일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다. 고작 일주일, 한 달 애도를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잘못으로 여겨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인재를 예방하고, 다시 합리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서. 그 후에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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