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자(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아직 혼인하지 못한 자’라는 뜻을 가진 ‘미혼’보다는 ‘혼인하지 않은 상태’로서의 비혼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와 같이 표기하였다.)에서 기혼자가 된 후 두 번째로 맞이하게 된 크리스마스. 이제 나에게 ‘크리스마스 때 뭐해? 계획 있어?’라고 묻는 이가 없다.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의 세례를 맞아 이성애 중심적인 연애를 하는 ‘연인’들의 날이 된 탓에, 한창 연애를 하는 나이에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연인과 함께 뭐라도 특별하게, 낭만적으로 보내야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관념에 사로잡힌 이들은 연인이 아닌 사람과 보내는, 이를 테면 집에서 가족들과 보낸다거나 혼자 이불 속에서 늦잠을 자고 귤을 까먹고 해리포터를 정주행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옆구리가 시린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외로운 시간 때우기라며 깎아내렸다. 그들은 나에게도 이러한 말로 ‘크리스마스는 무조건 연인과 보내야 해!’ 라는 수상한 종교적 생각이 깔려있는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곤 했다.
“크리스마스 때 애인도 없으면 혼자 뭐하냐?”
나는 그들의 가스라이팅이 그저 우습다고 느껴졌다. 크리스마스랑 애인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지. 나는 애인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때 어느 예쁘다거나 ‘힙’하다는 이유로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연애하던 당시의 옛 애인들에게 선언하듯 말했었다. ‘크리스마스 때 어디갈까?’하는 물음에 크리스마스 때 밖에서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디 가는 게 너무 싫다고. 그러면서 어느 라디오에서 들었던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던) 통계를 근거로 들기도 했다.
“연인들이 가장 많이 싸우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래. 크리스마스에 특별히 로맨틱하고 싶고, 멋있게 보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보낼 수 없기 때문이지. 어디 나가면 사람 많고 시끄럽지, 차만 막히지. 크리스마스에 어느 특별한 장소에 가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실제로는 매우 낮은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만나지 말고 각자 집에서 아늑하게 보내자.”
나는 내가 뱉은 이 말 때문에 당시의 애인과 다투고 헤어질 뻔하기도 했는데(물론 결과적으로 헤어졌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라는 둥…’ 하며 내 말을 확대해석하는 그 사람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만나지 않는 대신에 다른 날 만나자고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MBTI 성향을 고려하여 감정형(MBTI 세번째 글자 F: Feeling)에 맞는 조금 다른 식의 접근을 시도해봤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건 이제와서 드는 생각이고,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대한 태도 뿐만아니라 여러 면에서 가치관이 충돌하는 그와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고형(MBTI 세번째 글자 T: Thinking)의 남편을 만나 크리스마스에는 집에서 쉬는 것이 기본값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휴일을 보낸다. 그게 우리에게는 크리스마스의 낭만이자 행복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있었던 인생의 모든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별 일 없이 보낸 것만은 아니다. 영화관을 가본 적도 있었고, 의도치 않게 명동거리를 나가본 적도 있었고, 호캉스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아마도 마지 못해 끌려나와 시끄럽고 사람많고 춥기만 하던 거리를 돌아다닌 그 때의 경험이 나에게는 딱히 즐겁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고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집이 최고!’ 라는 깨달음으로 남아있게 된 것일테다. 그렇다고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특유의 화려한 거리와 장식, 북적이는 분위기를 만끽하고 주변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 또한 그 나름의 행복일 것이다. 다만 집에서 아늑하게 즐기는 사람들을 ‘외로운 사람’이라거나 ‘불쌍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이들이 문제다. 그런 몰아감 때문에 즐겁지 않은 장소에서 즐거운 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그 사람과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함께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때 혼자 있고 싶다는 이가 있다면 그의 성향을 그저 인정해주자. 화려한 거리로 나가고 싶은 사람과 집에서 아늑하게 있고 싶은 사람이 충돌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무조건 이렇게 보내야지!' 할 게 아니라 서로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을 제외한 덜 붐비는 날을 우리만의 크리스마스로 즐기고 당일에는 함께 집에서 오붓하게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현명한 척했지만 막상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는 사실 조금 걱정이다. 그 전에 나에겐 크리스마스가 공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특히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어서 존재 자체를 간과한 나머지, 도로가 원활한 평소에도 자가용으로 최소 4시간은 족히 걸리는 시댁에 가겠다고 내 입으로 선언해두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 다른 데 나가지 않고 집에서 보낸지 10년이 넘게 지난 것 같은데, 그런 날 특히나 자가용을 끌고 밖에 나가보는 건 더구나 아예 처음이다. 크리스마스에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이 과연 원활할지 아닐지는 결국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체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해뜨자마자 새벽에 출발하는 수밖에. 그래도 어쩌면 크리스마스가 귀성길로 북적이는 가족을 위한 명절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또 하나의 교훈으로 삼아, ‘시댁에 간다면 이 날만은 꼭 피해야하는 날’ 로 기억하게 될 수도 있겠지. 크리스마스임을 간과하고 잘못된 계획을 세운 나 스스로를 원망하고, 내년부터는 ‘크리스마스’임을 꼭 기억해두었다가 아무데도 가지 않기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조용하고 평온하게 보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당신의 고요한 크리스마스가 절대 고독의 증거가 아니며, 홀로 또는 집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충만한 시간을 보내는 그 시간 자체를 그저 행복하게 즐겨도 된다고.
+ 나중에 덧붙이는 말: 다행히 크리스마스 때 고속도로 정체는 거의 없었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