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싫어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더라. 어렸을 때는 분명 눈이 내리는 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도 좋아했었다. 나 보다 세 살 많은 오빠와 함께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드름을 따서 수집하고, 그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했던 기억도 있다. 눈을 뭉쳐 던지는 눈싸움은 물론이고, 종이 상자를 들고 비탈길을 올라가 타고 내려오는 썰매놀이까지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놀이였기 때문에 겨울이 좋았던 적도 있다. 온 동네가 놀이터가 되니까. 그렇게 온 동네를 놀이터 삼아 열심히 놀 던 때는 겨울의 추위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나이가 된 이후부터 겨울을 좋아할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겨울이 새삼 더 춥게 느껴지게 된 건 교복을 입기 시작한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내가 중학생이었던 20년 전 무렵만 해도, 날씨가 어떻든 교복 위에 패딩을 입는 게 허락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학대 아니었나. ‘동복’이라고 불리는 교복의 재질이 그리 따뜻하지도 않았다. 또한 바람이 불면 펑퍼짐하게 퍼지는 360도 주름치마였다. 아무리 추워도 치마 밑에 바지를 입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허용되었던 건 그저 내복을 입고, ‘기모 스타킹’을 신거나 그보다 더 춥다면 기모 스타킹을 두 겹 입는 것과 두꺼운 까만 양말을 덧 신는 것 정도. 학생 다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체 학생다움이란 무엇인가?) 때로 교복 위에 후드티를 입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역시 ‘교칙 위반’이었다. 물론 꼭 추울 때만 입는 건 아니고 나름의 ‘멋’과 ‘유행’을 추구하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학생이기 때문에 멋과 유행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건. 특히나 여학생들은 아무리 추워도 치마에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는 교칙이 그랬다.
내 수족냉증은 그런 중, 고등학생 때 발병했거나 악화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극도로 제한된 신체활동과 보온에 취약한 교복과 스타킹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겨울을 떠올리면 담요를 늘 이불처럼 덮고 있던 기억이 난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한 교실을 쓰는 30명의 학생 중 적어도 2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기만의 담요가 있었다. 때로 담요를 두른 채로 복도에 나가면, 선생님들이 담요를 두르고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얘기했던 적도 있다. 그 역시 ‘보기에 좋지 않아서’였다. 담요를 하루 종일 두르고 있어도 손과 발이 시렸고, 손은 시리다 못해 손톱 밑이 파랗게 변했다. 글씨를 쓰다가 손을 비비고, 주머니에 넣고 난로 위에 대보기도 하며 겨우겨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요즘의 중, 고등학교에서는 그나마 니트로 된 조끼 교복을 입거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편한 ‘생활복’을 입는 걸 허용한다고 알고 있다. 요즘 교복이라고 하는 ‘롱 패딩’도 있고. 내 어린 시절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할테다.
그렇게 추위에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던 10대(지금의 10대들은 아니길 바란다)를 지나, 자유롭게 입을 수 있어도 보온보다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옷을 입던 20대를 지나, 무엇보다도 보온과 편한 걸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어엿한(?)’ 30대인 지금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소식이 들리면 위아래 내복을 갖춰 입고 기모가 들어간 티와 기모 바지를 입고, 패딩 슈즈와 롱 패딩을 입는다. 목도리와 장갑까지 챙겨 무장한다. 분명 예전보다 훨씬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데도 겨울이 두렵다. 아무리 껴입어도 체온 자체가 낮아지면 보온 따위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보온만으로 되지 않는다면 발열체를 들고 다닌다. 핫팩이나 보조배터리 형태로 나온 전기 손난로. 그 정도면 바람이 쌩쌩 불어 살을 에는 추위까지도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다. 가장 쉽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일단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겨울은 집이 최고다. 나는 출퇴근을 제외하고 그 밖의 외출을 최대한 삼간다. (할 수만 있다면 출퇴근도 하고 싶지 않다… 메타버스 책방을 운영해야 하나) 운동을 하고 싶던 마음은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지 오래다. 대신 겨울을 느낄 수 있는 제철 음식을 먹는다. 부모님이 수확하여 보내주신 고구마와 감, 밤, 청주 집에서 직접 말린 곶감. 마트에서 사 온 귤. 보일러를 틀어 집안을 훈훈하게 한 뒤에 따뜻한 차와 과일을 먹는다. 그러면서 겨울을 배경으로 한 시나 소설을 읽거나 눈이 내리는 풍경을 찍은 영상을 보면 집 안의 훈훈함이 극대화된다.
집에서 따뜻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늘 목을 따뜻하게 한다. 목도리를 매일 두르고, 밖에 돌아다닐 때 늘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코로나19 때문에 시작된 마스크 생활이지만 확실히 마스크를 쓴 뒤로 감기에 걸리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코로나19 가 기승을 부린 지 만 3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용케 코로나19와 독감들을 모두 잘 피하고 있다. 특별한 노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바이러스에 취약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늘 말씀하셨었지만 어릴 때에는 그리 새겨듣지 않던 방법들이다. 이제와 새겨듣고 실천하게 된 건 나를 보살펴야 하는 이가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나를 챙기지 않아서 아프게 되면 얼마나 서럽고 괴로운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찬 거 마시지 않고 따뜻한 거 마시고, 옷 따뜻하게 입고, 귤처럼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을 잘 먹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은 사실 없다. 그저 이번 겨울도 별 탈 없이 아무도 추위 때문에 아프지 않고 지나갔으면, 눈 때문에 길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없었으면 바라는 수밖에.
대신 ‘추위’ 덕분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최근에 새롭게 발견해서 겨울이 싫은 마음이 꽤 많이 희석되었다. 바로, 눈을 모아 틀 속에 쏙 넣으면 귀여운 눈 인형들을 대량 생산해낼 수 있는 ‘눈 집게’다. 몇 년 전부터 ‘눈 오리’가 유행할 때는 만드는 사람들을 보기만 하고 큰 관심이 없었는데, 며칠 전 카카오 프렌즈 샵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춘식이’ 눈 집게를 발견하고 나서는 눈이 쌓이길 바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눈 온날 밤 공원에 ‘눈 춘식이’를 몇 개 만들어 놓고 다음날 그 자리에 가서 보니, 누군가가 춘식이 머리 위에 눈 오리를 올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두었다.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눈으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 편입된 느낌이었다. 또 한 가지는 겨울 철새들을 보는 일이다. 날이 추워지면 우리나라를 찾는 새들이 있다. 새를 관찰하는 취미를 가진 후로 처음 맞게 된 겨울이어서 나에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겨울의 풍경이 보였다. 새들도 기온이 낮아질수록 더 두툼한 깃털옷을 입는다는 것, 호수와 하천에는 각종 오리류들이 찾아오고, 하늘에는 유유히 나는 맹금류들이 있다는 것. 춥고 황량하던 겨울이 하늘의 이웃들 덕에 다채로워졌다. 추운 날씨는 여전해도 겨울에 이런 풍경도 있다는 걸 보게 되어서, 알게 되어서 이번 겨울은 즐거운 순간이 더 늘어날 것 같다. 따뜻한 실내에서 추운 날씨를 견디고, 감기 바이러스들을 이겨내고, 귀여운 것들을 보며 즐기다보면 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