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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Feb 10. 2023

당신의 기대를 저버릴지라도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하여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반가운 마음보다도 한숨이 우선 나온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서 산 지 올해로 14년 차가 된다. 충분히 애틋해질 만큼 떨어져 살았으며, 일 년에 뵈러 가는 횟수를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가끔 뵈러 가니 충분히 그리울 법한데도,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귀찮음과 무뚝뚝함, 무관심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가 입에 배어버려서 엄마를 늘 서운하게 만든다. 직장 생활하면서 업무전화를 받을 때처럼 저절로 깍듯하고 친절한 모드로 전환할 수 있었더라면 엄마가 기뻐하셨을 텐데, 그게 참 이상하게 생판 얼굴 모르는 남한테는 되는데 엄마에게는 결코 되지 않는다.


부모님 입장에서 이런 나는 ‘정이 없는 아이’이기도, ‘딸 같지 않은, 무뚝뚝한, 애교 없는 딸’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님 슬하에 딸은 내 이전에도 없거니와 이후에도 없었고, 우리 엄마도 부모님한테 ‘애교 있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오로지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애교 있는 성격이기를 평생 동안 기대해 오신 데다가 그 딸이 올해로 서른셋이 되었는데도, ‘딸답게 애교 있기를 바라는’ 그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셨다.


부모님이 나에게 건 기대를 내가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그 이외에도 무척 다양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애교 많은 딸’은 그야말로 애교에 불과하다. 수많은 부모님의 기대 중에서도 아마 부모님 생각에 가장 쉽게 요구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몇 살이 되었든 ‘이제는 글러먹었다’며 포기할 이유가 없으며,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꾸만 입에 그 말을 올리게 되셨던 것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그 ‘작은’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다. 그래서 그냥 듣고 흘러 넘겨도 될 말을 굳이 굳이 말로 이겨먹고, 부모님이 결국에는 ‘내가 애교 많은 딸이 되는 것’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게 되시기를 바랐다. 반대로 이건 내가 부모님께 거는 기대라면 기대다.


부모님 생각에는 ‘애교’를 갖추는 것이 ‘딸’로서든 ‘여자’로서든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실지 몰라도, 나는 늘 ‘그런 건 성별에 관계없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애교 없는’ 내 유전자의 근원인 엄마와 외갓집 이모들을 사례로 들고, 내가 기억나지도 않는 어렸을 때부터 ‘뽀뽀’를 한사코 거부했다는 일화를 다시 한번 사례로 들고, 한편으로는 애교라는 것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말했다. ‘애교의 본질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생겨난 행동양식이고, 그런 것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애교를 부릴 이유가 없는 상황이면 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요즘엔 텔레비전에서도 여자 연예인들한테 애교를 보여달라고 하면 구식이라고 욕한다.’ 그러면 엄마는 ‘얘는 왜 싸우려고 드냐’고 하시면서, 얼마가지 않아 또다시 ‘애교’ 있기를 바라는 기대를 드러내셨다.


부모님은 한 때 내가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기도 하셨다. 1990년 대생인 우리 또래에 196-70년대생인 부모님들이 흔히 갖게 되는 아주 전형적인 기대. 우리가 어린이였을 1998년에 부모님은 IMF를 겪었고, 우리가 대학을 졸업할 시기 즈음에 ‘최악의 실업난’이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될 때였으니 뭐든 쉽지 않아 보였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무엇이 전망이 보장된 일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국가고시를 치러,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잘리지 않으며 연금이 보장된 직업을 얻는 것이 가장 ‘나은 길’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내내 ‘장래희망이 뭐냐’는 물음을 듣고 자란 나는 장래희망을 이루는 것이 곧 삶의 의미나 목적이라고 생각했고, 그 장래희망이란 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안정적으로 벌거나, 사회적으로 그럴싸한 직업을 갖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를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공기관의 계약직 직원이 되었을 때는 정직원이 되기를 바라셨다. 부모님은 내 가방끈이 긴 것에 비해 연봉이 턱없이 낮다고 생각하셨고, 내 세계에서는 연봉과 가방끈의 길이가 정비례하지 않는 현실이 그저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 ‘공채(공식채용)’의 세계와 수시 채용의 세계. 비정규직과 계약직과 정규직의 세계. 그 세계를 부서뜨리고 싶은 건 누구보다도 나였다. 딱히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닌데도 ‘공식채용’이 되기 위해 노력할 마음까지는 없어서 버틸 만큼 버티다가 그만두었다. 정직원이 될 수 없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기를 바라셨다. 나는 내가 성인이 되면,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가서 부모님과 따로 살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잇따르는 부모님의 기대 속에서 나는 어느 순간 알았다. 앞으로도 나에게 수많은 기대를 하실 거라는 걸. 그처럼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는 걸.


요즘 부모님은 내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 책방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신다. 책방을 시작할 때 물론 걱정을 하시긴 하셨지만,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하며 못내 수긍하셨는데 막상 내가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는 것 같으니 계속해서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다. 엄마 전화를 받으면 엄마는 ‘출근했니, 손님은 좀 있냐, 바쁘냐’고 물어보시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님 많다고 바쁘다고 거짓말할 수야 없지 않나, 내 서툰 거짓말 실력 때문에 금방 들통이 날 것이 뻔하니. 지금까지 부모님의 기대와 다르게 살아오며 잘 견뎌왔듯 하루하루 살아낼 뿐이다. 내가 부모님의 기대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걸 우리 부모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 기대를 담은 말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터져 나오는 것일 테다. 이 또한 과정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꿋꿋하게 부모님의 많은 기대들을 저버리며 내 멋대로 잘 컸다. 부모님의 기대는 다행스럽게도 기대에만 그쳤던 것이다. 때로는 많은 부모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강요나 억압이나 폭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그 많은 기대를 하셨고, 또 나를 위해 어떤 기대들은 많이 포기하셨을 것이다. 포기한 기대는 또 다른 새로운 기대의 형태로 변모하기도 하며. 아마 나를 정말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나는 부모님의 사랑에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내 멋대로 사는 방식으로 보답했을 뿐이다. 부모님의 그 기대 이면에는 사실, 내가 그저 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마음껏 마음대로 생각하며.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 같은 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우리 부모님께 받은 사랑의 방식을 조금은 되풀이하게 될지 모른다. 나와 닮았지만 나보다 행복하길 바라고 더 좋은 것들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나 또한 갖게 되겠지. 그 기대하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겠지만 결국엔 그 아이의 삶을 응원할 것이다. 우리 부모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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