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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May 19. 2023

내가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준 이(들)

과거의 스승과 현재의 스승

학교 다닐 때에 대부분의 선생님들을 좋아한다기보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여느 청춘 드라마에서처럼 한껏 반항하다가 선생님의 어떤 한 마디나 진심 어린 행동에 감동을 하고 개과천선하는 그런 스토리는 내 인생에 없었다. 나는 그냥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마음속으로만 반항하는, 겉보기엔 모범생 같은 아이였다. 선생님을 싫어하거나 학교에 가기 싫다거나, 이 나라의 교육체제가 모두 썩었다거나 하는 건 속으로만 생각하며 기껏해야 가끔씩 혼자 노래방에 가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만 목청껏 부르곤 했다.


내가 한 때 진심으로 좋아했던 선생님은 수업을 들어본 적도 없고, 담임인 적도 없었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좋아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건 고3 때였다. 그분은 고1 담임과 문학 수업을 담당하고 계셨는데, 내가 처음 찾아뵙게 된 건 소설 공모 대회 때문이었다. 교실 게시판에 붙어있었던 ’ 대산 문학상 모집 공고’를 보고 난생처음으로 지원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한 번도 글쓰기 공모전에 글을 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전말은 이러했다.


고등학생 때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건 학교 밖에서 하는 고등학교 연합 독서 토론 동아리 활동이었고, 그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책을 좋아하게 되고 처음으로 서툴게 시나 소설을 끄적이곤 했었다. 그때 썼던 글들을 같은 동아리 친구들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조금씩 보여주며 나름대로 ‘잘 쓴다’, ‘재밌다’는 평을 받았었고 그 말에 꽤나 글에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문학상 공고에 대해 담임 선생님께 여쭤보니 1학년 교무실의 ’Y샘‘이 담당이니 그분께 가보라고 하였다. 문학상에 글을 응모하고 싶다고 쭈뼛대며 말하는 나를 Y샘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00일까지 글을 써서 보여줄 수 있겠니?”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어떤 고등학생이 앞으로의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는, 당시 스스로의 모습과 바람이 적당히 섞인 이야기였다. 그때 나름대로 내 글에 만족했는데, 지금 보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유치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찾아보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니, 묻어두기로 하자. 어쨌든 그 글을 Y샘께 제출하고 하루 뒤인가 이틀 뒤에 Y샘이 찾는다는 어떤 친구 전령의 말을 듣고 교무실에 내려갔다.


“진짜 잘 썼다. 소설가가 꿈이니?”

그 칭찬이 무척 기쁘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소설은 취미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쉽네, 글을 취미로 쓴다니. 어쨌든 글은 꾸준히 쓸 거지?”

그 말에 내가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Y샘은 내 글에 대해 몇 가지 느낀 점을 말해주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하면 좋겠다, 이 부분은 어떤 의도로 쓴 건지 물어보며 이런저런 코멘트를 해주었다. 교과 수업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쓴 내 글에 대해 어떤 어른이 그토록 글을 진지하게 읽고 코멘트를 해 준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이 인정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만족감이 있었다. 나는 그 한 명의 진지한 독자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더 열심히 글을 썼다.


공모전에 제출할 글을 다 쓴 이후에도 몇 편의 짧은 글을 Y샘께 자꾸 들고 가서 보여주었다. 당시에 고3 교실은 5층이었고 Y샘이 계신 1학년 교무실은 1층이었는데, 나는 10분의 그 짧은 쉬는 시간에 최대한 여러 번 Y샘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1층에서 4층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곤 했다. 하루에 몇 번씩 일 때도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쓰고 싶어서 쓰는 건지, 보여주고 싶어서 쓰는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네 글은 좋은데, 자기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조금 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다른 넓은 이야기도 써보면 좋을 것 같아.”

내 몇 편의 글을 본 Y샘은 그런 이야기도 해주셨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라 기억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외연을 넓혀 보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어쨌거나 나는 글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구가 너무 컸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에. 타협하여 내 이야기를 보편적인 차원으로 읽힐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Y샘은 당시 여고에 몇 안 되는 ‘젊고 훈훈한 남자 선생님’으로 쉬는 시간마다 인기가 많았다. 수업이 끝나고 없는 질문도 만들어서 몰려오는 학생들 때문에 쉴 틈이 없었을 와중에도 내 글까지 봐야 했던 선생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청소년기답게 이기적이었다. 그러면서 Y샘을 찾는 많은 아이들 중에서 글을 써서 보여주는 학생은 나 하나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Y샘께 글을 보여주고, 또 피드백을 받을 때면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그 당시의 선생님 나이와 비슷해진 30대 중반, 내가 Y샘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처음엔 그래도 귀엽고 대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자꾸 글을 들고 오는 그 학생이 조금은 귀찮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Y샘이 귀찮은 내색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나는 평생 Y샘을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의 추억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결국 공모전에서는 탈락했지만 Y샘은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거기에 무슨 비리가 있네’ 라며, 그 문학상을 운영하던 교보 재단을 보이콧해야겠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나도 정말 그렇게 믿었는데,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교내 소설 공모전에서도 박한 평가를 받았을 때 내가 문학적 재능이 그리 있는 편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심사위원들이 보는 눈이 없었을 수도 있지.(?) Y샘이 정말 당시만큼은 빛났던 나의 재능을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고 하자.


어쨌거나 나는 분명 대단한 글은 아니어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면서 글을 쓸 때면 Y샘을 종종 생각한다. 내가 소설가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나마 지금은 독립출판으로 책을 하나 낸 작가가 되었다는 걸 Y샘은 알까. Y샘이 내게 해주었던 칭찬과 응원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는 걸, 알까. Y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나에게 Y샘은 내 글을 읽고 진지하게 평해준 첫 어른 독자였다. 덕분에 뭐가 됐든 글을 계속해서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Y샘이 혹시나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때 서툴렀던 내 글을 진지하게 봐주고 응원해 주신 덕분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 나 같은 학생을 만날지 모르는(이미 만났는지도 모르는) 온 세상의 선생님들께, 미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Y샘이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주는 독자와 동료들이 생겼다. 꾸준히 글을 함께 쓰는 마감 동료들과 서점에서 매주 새롭게 즉석에서 글을 쓰고 느낌을 교환하는 글쓰기 손님들, 온라인을 통해 피드백을 주고 받는 글쓰기 모임 동료들. 이들이 모두 이제는 내게 글쓰기 스승이 되어주고 있다. 나도 직접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모임을 통해 누군가에게 내가 Y샘 같은 존재가 된다면 진심으로 뿌듯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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