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호라 Jul 08. 2023

세상에, 이런 시누이가 어딨 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사전을 찾아보니 ‘겉으로는 위해주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헐뜯는 사람이 더 밉다는 말’이라는 뜻풀이가 나온다. ‘시누이’라는 대명사가 그런 못되고 이중적인 사람의 대표 격으로 쓰이니 누군들 그런 시누이가 되고 싶을까.


내 오빠는 꽤 이른 나이, 스물다섯에 결혼하였고 나는 그 덕에 얼떨결에 시누이가 되었다. 내 나이는 그때 스물둘이었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 전혀 상상하거나 준비하지 않았을 어린 나이였다. 새언니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를 때도 너무 어색했다. 어쨌거나 나는 '시누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저런 '말리는 미운 시누이'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미운 시누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였다. 연락도 따로 한 적 없고, 어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부담을 느낄까 봐 축하 선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돌 때 정도 축하 선물을 했던가. 기념일을 챙기기 시작하면 서로 끝도 없이 챙기게 될까 봐 대체로 모른 체하며 혹은 정말로 무심하게 지나갔다.


어느 날, 본가에 내려갔을 때 엄마는 나에게 새언니에게 전화해서 집에 방문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그때 말하는 요령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혼이었던 오빠네 부부에게 시댁 식구들이 금요일 저녁에 갑자기 방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엄마가 시키니까 새언니에게 해맑게, 물어봤었다.

 

  “언니, 오늘 저녁에 혹시 놀러 가도 돼요?”


새언니는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새언니는 당일에 이러는 건 아니라며 완곡하게 그러나 그 거절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며, 방문하고 싶으면 미리 연락을 줘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생각 없고 개념 없고 못된 시누이 당사자가 내가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또 어쩐지 억울했었다. 지금 같았다면 엄마가 물어보라고 시켜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 나는 '그냥 엄마가 시켜서 물어봤을 뿐인데' 하는 생각에 엄마도 원망스러웠고, 또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새언니도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새언니와 통화를 마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내 모습을 엄마가 보고는 왜 그러냐고 했고, 나는 새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다시 새언니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얘는 내가 그냥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그렇게 대변인 듯 해명인 듯 해명 아닌 해명을 했던 것 같다. 새언니와 나는 어쨌거나 그날 바로 오해를 풀었고, 그 일이 있었던 덕분에 나와 새언니는 서로가 지켜야 할 적정선을 알아가게 되었다.

 

오빠가 결혼한 때로부터 무려 7년여의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했고, 내게도 시누이가 생겼다. 남편의 여동생이자 나와 동갑인 그 친구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알면 알 수록 활달하고, 잘 웃고, 다른 사람들을 잘 챙기는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어서 본받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시누이와 특별히 친해지게 된 계기는 결혼식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제주도에 웨딩스냅을 찍으러 갔을 때였다. 나와 남편은 당시 둘 다 운전을 하지 못했었는데, 야외 웨딩스냅이란 건 의상과 기타 등등의 짐을 싣고 드레스 헬퍼와 함께 장소를 이동하며 차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찍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걸 스냅 촬영을 무작정 예약한 뒤에야 알았다. 택시를 종일 빌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남편이 묘안을 떠올렸다. ‘운전을 여동생한테 부탁해 볼까?’ 나는 단번에 그게 좋겠다고 했고, 부탁하기 미안하니 우리가 숙소비와 교통비, 그 밖의 일정에 대해 밥값을 모두 지불하는 조건으로 하자고 했다. 친구와 여행을 하듯 즐겁게 제주도를 셋이서 여행했고, 스냅 촬영을 하던 날에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아서 너무나 고마웠다. 나와 시누이는 남편이 먼저 잠들었던 날 밤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 깊이 친해졌다.


선물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시누이는 모과청과 탱자청, 매실청을 담아 선물해주기도 했고, 여러 가지 만드는 것도 좋아하는 터라 직접 만든 수제비누와 뜨개 손가방을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나도 몇 번 보답한다고 선물을 했던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게도 내가 지금까지 받은 게 훨씬 많은 것 같다.


게다가 얼마 전, 서점 1주년을 축하하는 꽃바구니까지 보내왔다. 꽃바구니를 받는 것 자체가 처음이어서 그냥 받아도 감동이었을 텐데, 내가 인스타그램에 몇 번 언급했었던 근처 꽃가게를 기억해 두었다가 그 가게에 연락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꽃을 위주로 구성해 달라고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꽃가게 사장님께 들었다. 거기다 나는 처음에 꽃바구니가 우연히 모임 시간에 온 건 줄 알았는데, 그조차 의도된 것이었다는 걸 듣고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토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생각하여, 완벽한 선물을 해줄 수 있을까. 하나의 선물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있는지 다시금 깨달으며, 선물을 받는 친구가 무엇을 받으면 좋아하고 기뻐할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괴로워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선물 주고받기를 포기해버리곤 했던 나 자신의 매정함에 대해 반성했다. 내가 선물할 때 이토록 진심이었던 적이 있던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진심을 전했던 적이 있던가!


꽃을 받을 때, 나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이 시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 이런 시누이가 어딨 어요!”


그 말은 나를 자랑스럽게도, 부끄럽게도 하였다. ‘이런 시누이’를 만나 자랑스럽고 좋았으며, 나 스스로는 또 그토록 좋은 시누이가 되지 못했던 것 같아서부끄러웠다. 나의 시누이가 보내준 소중한 마음 덕분에 시누이라는 ‘역할’에 스스로를 제한하며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던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도 나는 새언니에게는 시누이로서, 내 시누이에게는 올케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누이와 올케는 사이가 좋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또 새롭게 다짐한다. 시누이와 올케는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충분히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경험이 그 고정관념을 깨는 하나의 사례가 되길 바라며 널리 널리 ‘이런 시누이와 올케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첫 차, 캐슈리와 함께한 일 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