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호라 Aug 30. 2023

술과 고기 대신 차와 옥수수가 함께한 MT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일박이일 MT의 전형적인 스케줄은 이러하다. 낮에는 바다에서 서로를 빠뜨리며 놀고, 저녁으로는 숙소에서 고기 바비큐를 구워 먹기. 밤에는 술 게임을 하며 새벽까지 놀다가 지쳐 잠들기. 그 일정 속에서 ‘술’과 ‘고기’, ‘바비큐’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몇 년 간 친구들과 이러한 형태의 MT를 꽤 여러 번 갔었다. 이십 대 초반에서 이십 대 중반, 후반까지 세월이 흐르며 함께 하는 친구들의 구성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MT의 메인 음식, ‘고기’와 큰 스케줄, ‘술 마시며 밤새 놀기’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는 한결같이 술 게임을 잘하지 못할뿐더러 술도 못 마시는 편이었는데 어쨌든 즐겁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MT에 대한 상상력이 그동안 너무나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놀지 못했던 것이라는 걸, 이번에 새로운 형태의 MT를 다녀오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술도 없고 고기도 없는 MT가 즐거울 수 있을까?


  얼마 전 비건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과 강릉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 커뮤니티를 하게 된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는데, 숙박하는 여행을 함께 가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일박이일도 아닌 이박삼일이었다. 모두가 완벽한 비건식을 매끼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는 만큼, 비건식을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카톡방에 모여 식사 사진을 공유하고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는 느슨한 형태로 시작한 모임이었다. 2년 동안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며 쌓아간 수많은 대화와 이를 통해 느낀 서로에 대한 유대감은 분명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이끌게 된 것일 테다. 비건을 지향하는 여섯 명이 모이면 어떤 여행이 될까, 이렇게 모여 여행을 가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설레었다.

“비건? 그럼 가서 고기 안 먹는 거야? 친구들이랑 MT 가서 바비큐 안 먹으면 뭐 먹어?”

  누군가가 우리 여행의 표면만 본다면 그처럼 물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여행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고기 말고 다른 것을 먹는 것이 더 편했고, 익숙했다. ‘비건’이라고 함은, 모든 종류의 동물성 식품과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운동이므로 우리는 육고기뿐만 아니라 해산물도 먹지 않았다. 이 전제가 당연하게도 깔려있기에 식사 메뉴를 정할 때 필요이상으로 고민하거나, 서로에게 양보하듯 정하지 않았다. 동물성 재료가 주가 되는 메뉴를 자연스럽게 배제하다 보니 의견이 대체로 일치했기에 마음이 편했다.

  보통의 무리에서는 다수인 논비건들의 식단에 따르거나, 논비건 친구가 ‘배려’해준다고 해도 소수일 수밖에 없는 비건 당사자는 조금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행에 와서 이토록 편하게, 고기나 해산물이 아닌 식단을 당연하게 선택하는 것 자체가 매 끼니마다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또한 강릉은 생각보다 비건 친화적인 도시였다. 외식으로 들깨칼국수와 도토리묵을 먹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자연스럽게, 술이 아닌 차를 마셨다. 술은 동물성 식품은 아니기 때문에 비건 식단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친구들 중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술이 없는 자리를 차가 채워준 것이다. 하동 여행을 다녀온 뒤, 차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 친구 J가 모두에게 녹차와 쑥차를 내려줬다. 하얀 도자기에 연한 녹색빛을 띤 따스한 차를 받아 들고 향을 맡으니 J가 그토록 차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적당히 따뜻한 잔을 손에 감싸 쥐고 호로록 몇 잔 들이켜니 몸이 노곤해지고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고요하고 차분하게만 논 건 또 아니었으니, 그건 바로 농사 보드게임 덕분이었다. 기본적으로 농사 게임은 주사위를 던져 나아가는 윷놀이나 부루마블과 유사한 형식이다. 부루마블이 세계여행을 하며 도시를 획득하고 거기에 빌딩을 세운다면, 농사게임은 24 절기의 이름이 쓰여있는 칸을 돌며, 씨앗을 획득하고 텃밭에 씨앗을 심고, 절기에 따라 작물을 수확한다. 게임 속에서 가뭄이나 장마, 태풍, 냉해 같은 자연재해를 맞으면 심어둔 씨앗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곳간에 수확해 둔 작물을 빼앗기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농사가 여간 힘든 게 아니네’, ‘자연재해가 정말 무섭네…’ 하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나는 매 판마다 주사위 운이 친구들보다 더 안 좋아서 자연재해를 심하게 겪고 제대로 작물을 수확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총 세 번의 팀전과 한 번의 개인전을 했는데, 나는 모든 판에서 꼴찌를 했다. 이로써 나는 술게임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 소질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게임은 승패와 상관없이 즐거웠다. 은근히 농사에 과몰입을 유도하는 그 게임은 꽤나 중독성이 있었다. 절기와 토종 씨앗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효과가 있어서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교훈과 교육효과, 스릴과 즐거움까지 모두 겸비한 이 보드게임이 더욱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농사게임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 (<제작자‘텃밭보급소’의 제작기 인터뷰 링크)


  MT 답지 않게 일찍 잠이 들었던 대신 다음 날에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새로운 곳에 간 김에, 할 수 있는 탐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친구 H 함께 경포가시연습지에서 새 관찰을 했다. 사진 기록을 남겨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카메라 배터리를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사진을 제대로 찍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눈으로 더 열심히 보게 되었다. 노랑때까치 유조로 추정되는 새로운 새도 만났다. 함께한 친구 H가 며칠 후에 쌍안경을 구매할까 고민된다며 메시지를 보내와서 내심 뿌듯했다.

  다른 친구들은 새벽시장에 가서 아침과 간식거리를 잔뜩 장 봐왔다. 복숭아와 자두, 블루베리, 감자, 옥수수. 순두부와 모두부, 그리고 친구 어머니께서 가정식 30여 년 경력 손맛으로 제조한 양념간장으로 우리의 멋진 자연 식물식 아침이 완성되었다. 이 식사 이후로, 내게 강릉은 신선한 순두부의 맛과 분이 나는 감자로 기억될 것 같다.






플라스틱 쓰레기 없이 카페 즐기기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바다에서 놀 겸, 해변가에 있는 카페에 갔다. 카페에서 아무도 먼저 얘기하지 않았지만 각자 챙겨 온 텀블러를 하나씩 꺼내어 주문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텀블러가 바다를 배경으로 테이블 앞에 놓이게 된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텀블러에 테이크 아웃을 하는 게 당연한 세상으로 바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 스테인리스로 된 다회용 빨대를 세 개 챙겨갔었는데, 필요한 친구가 있는지 물으니 다들 괜찮다고 했다. 한 친구는 입술에 잔이 닿는 느낌이 더 좋아서 빨대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도 잔에 입술을 대는 촉감과 온도를 좀 더 의식하고 즐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념품은 옥수수와 조개껍데기


  여행 첫날, 강원도의 남다른 옥수수 맛에 심취했던 우리는 옥수수를 한껏 쟁여 먹고 싶어서 마지막 날에 옥수수를 꼭 사리라 다짐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강원도에서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곳곳에서 즉석에서 찐 옥수수를 팔고 있다. 그런데 역시나, 간절하게 원하고 찾으려 하면 보이지 않는 이상한 법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었다. 그토록 흔해 보이던 찐 옥수수 파는 곳이 우리가 가는 길에는 왜 없는지…… 실망하고 있던 차에 마지막 식사를 위해 들어갔던 식당에서 운명처럼 ‘찐 옥수수 팝니다’라고 적혀있는 글귀를 보았다. 콩국수와 두부전골, 순두부를 파는 그 식당은 ‘직접 재배한 콩으로 만든 건강한 음식’을 판매한다는 내용도 메뉴판에 적혀있어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정갈하게 나온 밑반찬 몇 가지를 먹고 그곳에서 찐 옥수수가 무조건 맛있으리라 직감했다. 우리는 서로 앞다투어 각자 사고 싶은 옥수수 수량을 이야기했다. 최소 한 봉지에서 세 봉지씩, 각자 가져가고 싶은 옥수수 수량을 합해보니 총 아홉 봉지가 되었다.

  “옥수수 아홉 봉지(한 봉지에 찐 옥수수 4개씩, 봉지 단위로 판매하고 있었다.) 주문할게요!”

  우리가 옥수수를 한가득 주문한다고 하니, 식사 중이던 옆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우리도 옥수수 시킬까?’ 하며 일순 술렁였다. 그분들도 옥수수를 주문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잠깐이나마 ‘옥수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에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곡물과 나물, 구황작물, 과일로 구성된 식단이 누가 빈약하다고 했던가. 옥수수와 감자, 복숭아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출출할 때마다 꺼내먹으니 여행 내내 든든했다. 그러면서도 소화가 잘 돼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며 그곳에서 가져온 것은 한 봉지의 옥수수(차 타고 오는 길에 다 먹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욕심 낼 걸 그랬다…)와 바다에서 주운 한 줌의 조개껍데기뿐이었지만 여름의 다채로운 과일만큼이나 풍성한 추억을 한가득 마음속에 품고 왔다. 작은 조개껍데기를 볼 때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여행의 순간들이 파도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듯하다.


여태껏 실컷 비건식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나는 사실 평소에 논비건식을 꽤 많이 하고, 관계 속에서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주장하기보다는 타협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비건 대신 상대적으로 쉽다 여기는 소식과 비소비, 일회용품 덜 쓰기로 위안 삼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불성실한 불량 비건인이다. 그럼에도 지향점이 같은 친구들과 함께 완전 비건식을 하며 이박삼일 동안 여행을 하고 나니 그전보다는 조금 더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힘과 용기가 생겼다. 머리를 맞대고 뜻을 함께했기에 비건식을 챙겨 먹는 것이 결코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가 정성껏 내려준 차를 음미하며 진지한 대화를 하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 멤버 여섯 명 모두가 함께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텀블러와 손수건, 장바구니를 챙기면 이박삼일동안 여행으로 인해 발생했을 쓰레기 양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직접 경험했다. 이 여행을 다녀와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 이런 시누이가 어딨 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