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이후로 나에게 유럽은 늘 가을이었다. 일주일 전에 다녀온 가장 최근까지 더하여 현재까지 유럽에 세 번 다녀왔는데, 모두 9월에서 11월 사이인 가을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한 번은 동유럽(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쪽, 한 번은 스페인, 마지막으로는 이탈리아였다. 단 한 번도 유럽의 우중충한 날씨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세 번의 모든 여행을 도합 하면 총기간이 6주 정도 될 텐데, 그 기간 동안 비가 온 날은 단 3일 정도밖에 없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날씨에 내렸던 비는 그 촉촉함마저 사랑스러웠고, 천둥도 번개도 동반하지 않고 조용히 땅을 적시는 빗방울은 어딘지 모르게 낭만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유럽을 생각하면 파란 하늘과 선명한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유럽에 처음 다녀온 이후로 가을만 되면 나는 유럽앓이를 했었다. 내가 지금 있는 한국, 이곳의 가을도 충분히 아름다운데도 유럽의 풍경은 더욱 이상적인 곳으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할 때면, 이제 여름이 끝났구나, 하는 인식과 더불어 유럽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유럽도 워낙 넓어서 그중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무작정 유럽인 것이다. ‘이런 좋은 날씨에 가면 얼마나 끝내줄까. 얼마나 더, 멋있을까’ 하며.
그렇게 2020년부터 만 3년 동안 유럽 앓이를 하다가, 드디어 최근에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어땠냐고 한다면, 나는 아직 그 행복한 여행을 제대로 집약하여 말할 만한 어떤 한 마디 혹은 한 문장을 고르지 못했다. 다녀온 이후에 만난 사람들에게 ‘어땠어요?’ 하는 질문을 들으면 나는 일순간 멍해졌다. 아, 뭔가 내 여행을 집약할 수 있을만한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그 근사한 말을 찾지 못하겠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 좋았어요 ‘ 하고 만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좋았다는 말에 많은 걸 포함할 수 있으니까.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다면, 더 시간이 있을 때 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못다 한 얘기는 글로 써보는 거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느냐면, 모든 것이 좋았다. 날이 적당해서, 날이 뜨거워서, 날이 어떻든….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에 있다는 그 순간, 그 사실 자체만으로 완벽했다. 그렇다고 정말 모든 순간이 완벽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긴 하다. 조금 덜 완벽한 순간이 있을 때는 그 덕분에 추억이 생겨서 좋았다. 이런 건 역시 한국이 최고라면서 갑자기 애국자가 될 수 있어서 좋았다. 환승하는 공항에서 자동 출입국 심사기의 로딩시간이 하염없이 길 때, 인천공항이 그리웠다. 인천공항의 쾌적한 시설과 (아마도) 세계 최고로 빠른 최첨단의 출입국 시스템을 극찬하며, 남편과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자랑스러움, 일명 ‘국뽕’을 한 사바리 들이켰다. 콜로세움 근처에서 화장실이 급한 데, 1유로짜리 유료 화장실이 남녀공용 한 칸 밖에 없어서 1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을 때. 물론 그 기다리는 시간 내내 덥고, 시간 아깝고, 힘들었는데(생리 중에다가 속이 매우 안 좋았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더러우니까 생략한다), 돌이켜보면 한국어로 가차 없이 짜증을 낼 수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이때 역시 한국이라면 관광지에서 이럴 일이 없었을 거라며, 한국의 웬만한 국립공원 관광안내소와 휴게소, 지하철의 쾌적한 무료 화장실이 그리웠다.
여행 첫날 저녁으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함께 마셨다가, 오래간만에 마신 알코올에 호되게 혼이 나고 있을 때, 뒷골목 하수구에다가 어쩔 수 없이 몇 번이나 토하면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딱 한 잔만 마셨는데, 이럴 일인가 도대체! 여행 직전에 일주일 동안 코로나를 앓았어서 컨디션 회복이 덜 된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여행 내내 알코올 입에도 못 대는 거 아닌가, 그게 먼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며 토를 하고 있었다. 토하고 나서 이제 괜찮나 싶어 몇 걸음 움직이면 또 두통 때문에 어지러웠고, 그 와중에 배도 심하게 아파서 거리에 주저앉아있는데, ’Do yo need help?’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옆에서 부축해 주고 있었지만 지나가던 사람이 시간 차를 두고 두 번이나 걱정해 주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뭘 느끼고 말고 할 새도 없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 말을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새가 없었는데, 한참 지난 뒤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까지는 워낙 관광지이다 보니 소매치기가 많고, 차 유리도 깨는 도난 사고가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밖에 못 들었는데, 막상 이런 일을 겪어보니 사람들의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여행지에서 큰 걱정 없이 안심하며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사실 좋은 것들보다 나쁜 것, 안 좋았던 것, 힘든 것에 대해 쓸 때 말 혹은 글이 더 쉽게 써진다.(잘 쓴 글이냐와는 별개로…)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공들여 쓰고 싶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저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써도 문제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여행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한 순간마저 다행이었고, 괜찮았던 부분이 있어서, 그래서 좋았다고 써보고 싶었다. 쓰고 보니 이탈리아든 아니든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여서 좋았다. 그런 순간마저 사랑하게 만드는 건 여행이 알려주는 교훈 아닐까. 일상도 이런 식으로 모든 순간을 즐길 수 있더라면, 지나고 보면 추억이라고 아름답게만 기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행을 다녀와서 한참을 생각했다. 싱겁지만 내 결론은, 여행은 여행이고 일상은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일상은 늘 살아가는 것이고, 여행은 잠깐 떠났다가 오는 것이기 때문에. 잠깐 떠난다는 특별함이 더 많은 걸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주는 것 같다. 지금은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여행이 내게 준 힘을 최대한 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