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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Jul 28. 2023

폭우 속 운전 315Km

지난 토요일 오전 8시 40분쯤, 엄마에게 사진을 받았다. 도로가 흙탕물로 완전히 뒤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앞에 보이는 차의 바퀴가 조금 잠겨 보이는 듯했다. 청주에 사시는 우리 부모님은 외할머니를 뵈러 전라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청원 IC를 갔다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도로가 침수돼서 되돌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같은 날, 나와 남편은 동탄에서 시댁이 있는 창원까지 가려고 계획해 두었었는데, 그런 연락을 받으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엄마는 우리에게도 창원은 다음번에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완곡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엄마는 시가 어른들께 딸이 예쁨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 아닌데… 도로가 저 정도로 침수될 정도면 정말 위험한 거 아닌가,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선뜻 단번에 일정을 취소해야겠다고 결정하기 힘들었다.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도 고민이 되지만 이번에 미루면 8월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에 9월로 미뤄야 하는 상황이니 웬만하면 가자고 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긴 해서 나는 ‘고속도로 침수’, ‘침수 피해’ 같은 것을 검색해 보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작년 소식만 나오고 당일 급하게 올라온 속보 같은 것은 없었다. 남편도 물론 검색을 계속해보았고, 천천히 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돌아오더라도 일단 출발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동탄에서 창원까지의 거리 315Km, 도로를 달리는 네다섯 시간 동안 비는 쉼 없이 내렸다. 남편과 나는 교대로 운전했는데, 서로 절대 속도를 무리하게 내지 말자고 비장하게 약속했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되도록 2차선을 고집하며 시속 90Km 정도로 달렸고, 앞 차와의 거리를 평소보다 더 많이 벌렸다. 와이퍼가 앞유리를 좌우로 왕복하는 속도를 최대로 했을 때, 비가 쏟아졌다가 닦인 후 다시 쏟아지기 전까지, 그 사이로 시야가 확보되는 찰나의 시간들에 기대어 오다보니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갑자기 큰 소방차가 오른쪽 차선에서 나타나 우리를 추월하며 갈 때는 앞유리에 물이 와장창 쏟아져서 순식간에 시야가 3초 정도 가려진 적이 있었는데, 순간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래도 남편은 믿음직스럽게,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비상등을 누르고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였다. 운전하면서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거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실감하며, 일초에 서너번씩 왕복하며 비를 닦아주는 와이퍼에게 더욱 감사함을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빗속을 헤치고 창원을 2-30Km 남겨두고 창녕 즈음 와서야 비가 멎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동안 나는 다시 뉴스를 찾아봤는데, 오후 6-7시쯤이 되어서야 충북 지역에 침수 피해가 있다는 뉴스가 하나 둘 뜨기 시작했다. 시댁에 저녁을 먹고 난 이후 밤이 돼서야 오송역 인근 지하차도 관련된 기사를 처음 뉴스로 보았고, 다음날에 보도된 티브이 뉴스를 연달아보며 그 피해의 심각성을 현실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자꾸만 늘어나고 그다음 날에는 또 늘어있었다. 


오송지하차도에서 역주행하며 빠져나온 차와, 후진으로 빠져나왔지만 차가 결국 침수되어 차를 버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운전자의 블랙박스 영상을 보았다. 버스 뒤에 있던 화물차 운전기사가 떠밀려가던 승객 3명을 구해주었다는 뉴스도 보았다. 순식간에 침수되어 버리는 지하차도의 모습을 보며 아찔했다. 고속도로를 순식간에 덮친 산사태 장면도 목격했다. 우리는 그 시간 이후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만약 빨리 출발했다면 우리가 지나왔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사고 없이 창원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길을 나서는 걸 감행한 건 사실 오만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반성한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우리가 길을 나서기로 결정한 건, 출발한 시각에 알 수 있었던 정보가 제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고 현장에 사고가 벌어지고 구조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조금이나마 파악이 되고, 그것을 누군가가 취재한 뒤에야 그 사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알 수 있었던 건 엄마가 문자로 보내준 사진뿐이었다. 심지어 그 침수된 도로를 직접 보았던 우리 부모님도 되돌아와놓고서는 오후에 다시 출발했다. 부모님도 무사히 충청도 청주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다녀왔으나 우리 가족 모두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몇 달 전 차량용 비상탈출키트를 사서 가족들(친정/ 친오빠네/ 시가/ 시동생 부부 각 가정당 1개씩) 에게 나눠주고 우리 차에도 구비해 두었다. 안전띠를 칼로 자를 수 있고 반대편으로는 유리를 꾹 눌러서 깰 수 있는 간단한 장치다. 차가 전복되거나 침수되었을 상황을 대비하여 그런 것을 사 두었지만, 1분 만에 차가 침수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말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앞 좌석 손이 닿는 위치에 붙여둔 그 장치를 가끔씩 쓰다듬고 열어본다. 부디 쓸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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