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팬데믹 사태 이후 무려 3년 4개월 만에, 2023년 5월 11일, 공식적으로 ‘코로나 종식‘이 선언되었다.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결혼식을 치렀던 때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적 모임이 5인 미만까지만 가능해서 대부분의 청첩모임도 생략했고, 비대면 청첩모임도 해봤고, 결혼식에 초대하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결혼식을 인스타 라이브로 중계도 해봤고, 결혼식 단체사진에서는 나와 남편만 제외하고 모든 하객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해외로의 신혼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남해로 다녀왔고, 식이 끝난 후에는 식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답례품도 잔뜩 남아서 방향제와 와인이 한가득 친정과 시댁, 양가의 집에 쌓였다. 나에게는 삼십 년 인생에서 가장 큰 개인적인 행사가 가장 크게 피부에 와닿은 전 세계적인 재앙이 한 번에 겹쳤던 사건이었으므로 무척이나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런 결혼식을 앞두고 꾼 꿈이 있다. 꿈속에서 내가 결혼하는 날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실제로 내 결혼식은 8월 28일에 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었지만.)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결혼식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내 옆에 있었는데, 시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에게 말했다. ‘너는 너희 가족 차를 타고 가’라며. 그리고 남편은 나를 홀로 남겨두고 시부모님과 여동생이 타고 있는 차에 탔다. 가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찬 타는 출발 했고, 나는 눈이 오는 거리에 혼자 우두커니 남았다. 우리 부모님과 친오빠는 나를 위해 차를 타고 오지 않았다. 나는 서러운 기분으로 혼자 택시를 탔던가, 어떻게든 힘들게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식장에 도착해 있었다. 내 결혼식인데 모든 것들이 내가 없이도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어떻게 날 두고 갈 수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선명한 꿈이었다. 잠에서 깬 뒤에 그때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혼식을 한 달쯤 앞두고 나 혼자만 애를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나의 부모님에게도, 남편에게도 의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꿈속에서 우두커니 남겨진 나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나도 모르는 데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
내 결혼식이 있었던 2021년 8월 말, 당시 코로나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가던 때여서 정부는 2주 간격으로 거리두기 지침을 바꾸며, 2.5단계이냐 3단계가 되느냐 4단계가 되느냐에 따라 식장 제한인원이 변경되던 상황이었다.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도 4단계가 유지될지, 3단계로 완화돼서 양가 합산 총 49명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하객을 초대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49명의 명단을 확실히 추려서 명단을 미리 짜고 식장에 고지를 해야했다.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초대하고 초대하지 않을지 한 명 한 명 고심해서 결정해야했다. 그리고 모두가 나에게 ’ 결혼식을 가도 되냐 ‘, ’몇 명까지 식장에 들어갈 수 있대?‘, ’ 식장에서 밥은 먹을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 와중에 나와 함께 결혼의 당사자인 남편까지도 나에게 남 일 묻듯이 ‘**이가 몇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데?’라고 말했던 날,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했다.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혼자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내 결혼식을 위해 준비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결혼식에서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주인공이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내가 결정할 수 없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나는 차라리 모든 것이 세팅된 자리에 그냥 고명처럼 딱 얹어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꿈에서처럼.
결국 내 결혼식은 코로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결혼식 하객 인원 제한에 걸려, 초정예 멤버로 꾸려진 49명의 하객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싶다가도, 또 먼 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먼저 ’ 오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하며 어쩔 수 없이 초대하지 못했던 친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든다.
물론 하객을 내 뜻대로 초대하지 못했다고 하여 아쉽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그때 와주었던 친구와 친척들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하객 인원 제한이 어땠든 간에 어딘가에서든 아쉬움은 남았을 것이다. 코로나는 내게 또 다양한 변화를 남겼다. 기혼자가 된 변화와는 별개로, 나는 확실히 코로나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많은 북적대는 공간을 피해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찾아다니다 새를 관찰하는 ’탐조‘라는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코로나 한복판에서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함께 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코로나’가 있었다. 남편과 가족을 이루게 된 지는 이제 만 2년이 되었고, 결혼 전에도 1년 가까이 동거를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코로나가 시작된 시기, 2020년 2월에 남편과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동거를 시작하고, 코로나 거리두기 정책 제한이 가장 심했던 때에 결혼한 우리는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더 끈끈해졌는지도 모른다. 친구와의 약속도 어쩔 수 없이 줄여야 했고, 함께 다니던 운동도 코로나 때문에 포기해야 할 때가 있었고,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계셔서 자주 뵈러 가지도 못했다. 그러니 함께 사는 이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우리의 관계는 더 견고해졌던 듯하다.
코로나 시기를 겪는 동안 어떤 이들은 직장을 잃기도 했고, 학교 생활의 어떤 추억을 잃기도 했고, 어떤 소중한 기회를 잃기도, 누군가를 잃기도 했을 것이다. 코로나가 종식되었다고 그때 잃어버렸던 것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잃었던 어떤 것들의 자리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가 채우게 되지 않았을까. 코로나가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코로나 시기에 못했던 것들 때문에 그 기간이 모두 ‘순삭’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 긴 기간 동안 나에게 벌어진 변화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세상은 미쳐 돌아갔고, 그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미쳐있지만은 않았다.